2년간 얻은 것과 잃은 것
사실 내 워홀 비자는 지난 4월 말에 만료되긴 했지만 결혼하고 이직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흘려보낸 바람에 실질적으로는 상반기가 마무리된 이제야 워홀이 끝난 느낌이다. 나는 20대로 돌아가라 해도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후회 없이 하고 싶은 걸 다 원 없이 해봤지만, 딱 하나 아쉬웠던 게 해외에서 길게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으로도 20대가 끝나기 전에 진짜 하고 싶은 걸 마지막으로 해보자는 마음으로 떠났던 워킹 홀리데이였는데 경험하고 싶던 것들도 다 겪어보고 뜬금없이 구남친도 만나는 바람에 이곳에 가족도 생겼다ㅋㅋ
워킹 홀리데이의 로망과 현실
워홀을 떠나며 두 가지의 플랜을 세웠는데 플랜 A는 2년 동안 영국에서 마케팅 커리어를 쌓고 다시 한국으로 가는 것이었고 플랜 B는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운 좋게도 영국에 오자마자 브랜드 마케터로 2주 만에 취직을 해서 플랜 A를 순조로이 달성해가는가 했었는데... 결론적으로는 1년 남짓 일하던 와중 사업이 흐지부지되고 졸지에 백수가 되는 바람에 플랜 A는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플랜 B도 회사 다녀가면서 아이엘츠도 보고 연구계획서도 써서 몇 군데 시도해보았는데 소리 소문 없이 어느새 리젝을 당했거나 남편의 모교에 벽돌 값을 기부하는 슬픈 결과만을 얻었다^_ㅠ 그치만 나름 부트캠프를 겪으면서 외국에서 공부해보고 싶다는 로망은 이뤘고, 비록 플랜 A, B 모두 계획으로만 남았지만 그래도 개발자로의 커리어 전환이라는 뜻밖의 성취를 이뤘으니 후회 없이 워킹홀리데이라는 값진 기회를 알차게 썼다고 생각한다.
영국에 와서 얻은 것
한국을 떠나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잃어버렸던 2년의 시간이다. 12월생인 나는 괴랄한 한국식 나이 계산법을 따르면 실제 생물학적 나이인 만 나이보다 2년이 더 많아진다. 내가 실제로는 써본 적도 없는 2년이라는 가상의 시간 때문에 한국에서는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할 때마다 '내가 이 나이에 시작해봤자..'라는 패배감부터 밀려오곤 했다. 석사 졸업하자마자 취업준비에 뛰어들었을 때도 여자 신입 지원자 치고는 많다는 소리를 들었다 보니 내가 이 나이에 커리어를 바꾸는 건 상상도 못 하겠다 싶어서 개발자로의 꿈을 막연하게 꾸기만 했지 실제로 행동에 옮길 엄두는 차마 내질 못했었다. 근데 영국에서는 다른 사람이 내가 몇 살인지를 궁금해하지도 않고 외모로는 실제 나이를 가늠하기도 어려워하기 때문에 적어도 나이가 나에게 걸림돌이 되는 일이 없어졌다. 게다가 원래의 나이로 돌아오면서 2년이라는 시간을 되찾았기 때문에 좀 더 부담 없이 새 커리어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 살았을 땐 모든 것에 죽을 만큼 매달리지 않으면 인생이 망할 것만 같은 공포감에 쫓기듯 살아왔었는데, 영국에 온 이후로는 스스로를 좀 더 너그럽게 대해주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내 역량의 120을 쏟아붓더라도 채 80만큼도 성과를 못 내는 가성비가 떨어지는 삶이라 항상 우울했었다. 간절히 원했던 건 단 한 번도 쉽게 성취한 적이 없고, 하루하루 그저 버티기만 하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영국에서 살고 싶다는 평생의 꿈을 현실로 이룬 것만도 행복했는데, 커리어적으로도 내가 집중하고 노력하는 만큼 성취로 돌아오는 경험이 계속되다 보니, 꾸준히 이렇게 노력하다 보면 내 삶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도 생기고 자존감도 훨씬 높아진 느낌이다.
영국에서 잃은 것
한국을 떠나서 크게 후회가 되는 점이 아직은 없지만 그래도 가족들과 친구들을 자주 못 본다는 건 좀 슬프다. 엄마 밥이 그리우면 언제든 기차 타고 집에 갈 수 있었는데 이젠 정말 크게 마음을 먹지 않으면 한국에 가기 어려워졌다는 게 아쉽다. 그나마 이젠 백신 맞으면 자가격리 없이 한국에 갈 수 있다고 해서 냉큼 비행기표를 샀다! 8월쯤에는 2차 접종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넉넉하게 10월에 휴가를 내뒀는데, 부디 델타 바이러스가 그전까진 좀 잠잠해졌으면 좋겠다 ㅠㅠ
특히 영국에서 제일 그리웠던 건 동네 친구들과 독서모임의 존재였다. 서울이었다면 퇴근하고 맥주 한 잔 하고 싶다면 불러낼 동네 친구들도 많고, 주말마다 독서모임 나가서 친구들하고 온갖 수다 떠는 게 일상의 힐링이었는데, 런던에서 어렵게 찾은 독서모임은 코로나 이후 완전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그리고 타지에서 만나는 한국인들은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반면 조금 친해졌다 싶으면 런던을 떠나야 하는 일이 생겨 더 이상 만날 수가 없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가끔은 마음 맞는 동네 친구 한 명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앞으로의 목표
일단 커리어적인 목표로는 다음 승진 협상 시기에 미드레벨 엔지니어로 승진해서 원하는 만큼 연봉을 올리는 것이다. 아직 일 시작한 지 한 달밖에 안되었는데 혼자서도 더 어려운 일을 해내야 해!!라는 조급함이 생겨나고 있다...(아무도 나한테 그러라고 안했는데도;;) 그래서 1일 1 커밋은 꾸준히 해보자 싶어서 퇴근 후에도 개인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너무 지치고 피곤한 느낌 ㅠㅠ 마케터로 일했을 때처럼 나를 심하게 혹사시켜서 심하게 번 아웃되지 않도록 멘탈 관리도 잘해서 이번엔 얇고 길게 커리어를 길게 이어나가고 싶다.
개인적인 목표로는 올해 안에 집을 사고 싶다. 내 월급 명세서가 3개월 정도는 쌓인 다음에 시작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미뤄둘까 했었는데, 어차피 영국에서 집을 산다는 건 정말 오래 걸리는 일이라 일단 모기지 브로커부터 찾아보고 있다. (한국과는 다르게 모기지 브로커가 은행과 주택 구매자 사이에 끼어서 어느 정도, 어떤 형태로 대출을 받을 수 있을지를 알아봐 준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사실 어디서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나는 내 마음의 고향인 벨사이즈 파크로 돌아가고 싶다고 우겼는데 남편이 직장 위치로 보나 생활 패턴으로 보나 북쪽으로 올라갈 이유가 없지 않냐며 팩폭을 하는 바람에 워털루, 사우스뱅크 지역에 집을 사기로 잠정적으로 합의한 상태이다. 근데 런던 남쪽도 북쪽 못지않게 집값이 정말 후덜덜하다. 남편도 나도 꾸준히 연봉이 오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런던 시내 집값은 감당하기 벅차다ㅠㅠ 도대체 이 비싼 집들을 누가 사냐고요..? 그렇다고 고덜밍이나 길포드로 나간다고 해서 집값이 또 드라마틱하게 떨어지는 것도 아닌지라 도대체 어디에 집을 살 수 있을지 막막하다. 그래도 언젠간 남편도 나도 좋아할 만한 집을 찾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가져본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가 정말로 끝나고 나니 이제야 비로소 어른이 된 것 같다. 무작정 꿈과 열정만을 쫓았던 20대보다는 현실적이 되었고, 매일 닥쳐오는 하루를 버티느라 보지 못한 먼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평생 내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어떠한 일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좀 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미래의 내가 지구 상의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껏 내가 겪어온 모든 경험들을 자양분 삼아 부디 내가 꿈꾸는 멋진 할머니가 되어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