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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ime Weaver Dec 27. 2022

박규수가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운 이유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


1.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미국과의 첫 만남? 

  조선과 미국의 첫 만남은 1852년 미국의 포경선이 경상도 동래에 표착한 사건에서 시작된다. 1855년에도 포경선 투 브라더즈의 선원 4명이 강원도 통천에 표류해 오는데, 당시 조선 정부는 이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제공하고 청으로 이송하였다. 1866년에는 미국 상선 토불호가 표류해 온다. 이들은 배를 방문한 조선의 문정관에게 교역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지만, 조선은 이들에게 음식과 물을 제공할 수 있지만 교역은 국가가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뒤이어 같은해 6월에도 미국 상선 서프라이즈호가 평안도 철산으로 표류해 온다. 당시 평안 감사는 비교적 국제 정세에 밝았던 박규수였다. 박규수는 이들에게 음식과 의약품 등을 제공하였고, 이들의 희망에 따라 의주를 거쳐 청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렇듯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전에도 포경선과 상선의 표류 등을 통해 미국과의 비공식적인 접촉은 이어져왔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조선 연해에서의 안전한 항로 마련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고, 반면 조선은 전통적 유교 윤리에 의해 그들에게 음식 등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통상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유지해 나갔다.



2.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에 온 이유는? 

  제너럴 셔먼호는 스쿠너형 범선으로 선장은 미국 상인 프레스턴 이었다. 하지만 소속은 톈진에 있는 영국인 소유 미도즈 상사였다. 미도즈 상사는 제너럴 셔먼호와 계약을 맺고 상사 소속의 화물을 실었다. 그리고 영국인 호가스를 화물 관리인으로, 개신교 선교사 토마스를 통역 담당자로 동승하게 했다. 톈진항과 즈푸항에서의 출항 신고시에도 영국과 미국 영사관 두 곳에 모두 출항 신고를 한다. 

  제너럴 셔먼호는 출항 신고 당시 목적지를 러시아 항구인 파시에트라고 밝혔지만, 실제로 그들이 향한 곳은 조선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는 제너럴 셔먼호가 미도즈 상사의 요청으로 프랑스의 침략(병인양요)을 앞둔 조선에 무기를 밀매하기 위해 갔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제너럴 셔먼호가 중무장하고 있었으며 대량의 조총을 싣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삼고 있다. 실제 선원들은 문정을 위해 방문한 조선 관리에게 대량의 조총을 보여주고  우수함을 소개했었다.  판매의 목적이 아니라면 무기의 우수성을 굳이 소개할 필요가 있었을까. 또 시기적으로 병인양요 직전에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에 왔다는 점도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국은 조선 침략에 앞서 영국에게 함께 할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영국은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 미국이 단독으로 신미양요를 일으킨다. 제너럴 셔먼호가 영국 미도즈 상사와 계약을 하고 그들의 화물을 실었기 때문에 영국이 참여할 명분은 충분히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왜 미국의 제안을 거부했을까? 아직 그 이유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다. 다만 당시 제너럴 셔먼호가 일으킨 불법적인 행위 때문에 조선을 침략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영국의 자료들이 있다. 하지만 국제 관계를 도덕적 잣대로 분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외교는 국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이 측면에서 본다면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조선을 침략하게 되면, 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이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3.  박규수가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운 이유는? 

  톈진을 출발한 제너럴 셔먼호는 즈푸를 거쳐 8월 중순경 대동강 어귀에 도착하였고, 강을 거슬러 황해도 황주목까지 다다른다. 황주목사 정대식은 역관 이용숙을 대동해 그들의 내항 목적을 물었다. 제너럴 셔먼호는 교역을 위해 내항했을 뿐 별다른 뜻은 없다는 답을 하였다. 이에 목사는 외국 배가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은 불법이라는 사실을 경고했지만, 제너럴 셔먼호는 이를 무시하고 22일에는 평양부 신장포까지 도착하였다. 평양감사 박규수가 중군 이현익 등을 보내 즉시 물러날 것을 명했지만 제너럴 셔먼호는 이를 듣지 않고 상류로 계속 올라갔다.  25일에는 만경대를 지나 한사정 상류에 정박한 채, 소형 선박을 내려 수심을 측량하거나 강변에 상륙하였다. 27일 제너럴 셔먼호에서 소형 선박을 또나시 내려 강 상류로 올라오자 중군 이현익이 되돌아 갈 것을 요구하였다. 이 때 소형 선박에 타고 있던 선원들은 이현익의 배를 습격하여 제너럴 셔먼호로 끌고 갔다. 그리고 중군 이현익과 그 일행을 제너럴 셔먼호에 억류한다.     

  이에 평양부에서는 신태정을 보내 이현익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한다. 이현익이 구류됐다는 소식에 격분한 평양 군민들은 대동강변에 나와 항의하였고, 제너럴 셔먼호는 이들에게 위협 사격을 가하였다. 그러자 평양 군민도 활과 총, 돌팔매 등으로 제너럴 셔먼호를 공격하였다. 이에 제너럴 셔먼호에서도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하고 돌아갈 준비를 시작한다. 하지만 몇일 동안 내린 비로 불어났던 대동강의 물이 빠지면서 제너럴 셔먼호는 양각도에 좌초 당한다. 이 과정에서 퇴역 장교인 박춘권이 제너럴 셔먼호에 접근해 이현익을 구출해내었다. 초조해진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은 식수 등을 구하기 위해 상륙을 시도한다. 이때 평양 군민과 충돌이 발생하였고, 조선인 7명이 사망하고 5명이 다치는 피해가 발생한다.    

  9월 5일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제너럴 셔먼호에 화공을 시작한다. 작은 배에 기름을 끼얹고  섶을 가득 실은 후 불을 붙여 제너럴 셔먼호에 접근시킨 것이다. 낮아진 수위로 움직이기 여의치 않았던 제너럴 셔먼호는 피하지 못하고 결국 불타기 시작하였다. 선원들 다수는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토마스 신부와 중국 상인 조능봉이 뭍에 올라와 살려줄 것을 애원했지만 분노한 평양 군민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제너럴 셔먼호에 탑승했던 인원들은 전원 사망하였고 조선은 13명이 사망하였다.     

  사건이 일단락 되자 박규수는 장계를 올려 전황을 보고한다. 장계가 도착한 것은 청이 조선에 프랑스의 침략을 경고한 청 예부의 자문이 도착한 지 며칠 뒤였다. 대원군은 박규수를 비롯해 군공을 세운 이들을 포상하는 한편, 청 예부에 답문을 보내 서양 세력과 끝까지 싸울 뜻을 알린다. 재밌는 것은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은 이 배가 미국배인지 프랑스배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의 모든 기록에는 제너럴 셔먼호가 서양 선박이라는 기록만 있을 뿐 이것이 어느나라 배인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오히려 제너럴 셔먼호를 프랑스 배로 오인한 기록이 일부 있을 정도이다.



4. 미국은 왜 5년이 지나 신미양요를 일으켰는가?

  이 답은 간단하다. 미국 국내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1865년 남북 전쟁이 끝나고 군비 축소 정책을 추진하였다.  더욱이 같은 해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하였고 뒤이어 취임한 앤드류 존슨도 1868년에 탄핵을 당한다. 미국의 군비축소 정책과 정치적 불안은 미국이 조선 문제에 즉각적 개입을 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미국이 사건을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1차 원정 당시 조선에 왔던 리델 신부가 천주교인을 통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알게 되었다. 그는 즈푸로 돌아와 이를 미국의 즈푸 영사 샌포드에게 알렸고, 샌포드는 상해주재 총영사 시워드이게 이 사건을 보고한다. 뒤어 샌포드는 대동강 어귀까지 제너럴 셔먼호의  길안내를 맡고 돌아왔던 우문태를 통해 다시 한번 이 사건을 확인한다. 즉 제너럴 셔먼호 사건 초기부터 미국은 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너럴 셔먼호에 몇 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는지 조선을 간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미국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 대리공사 윌리암스는 총리아문에 연락해 이 사건을 알리고 생존자 여부를 알려달라는 요청을 한다. 청의 총리아문은 미국의 요청을 적절하게 처리하겠다는 답신을 보냈지만 구체적인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미국은 직접 조사에 나섰다. 1867년 와추세트호, 1868년 셰난도어호가 조선을 방문한 것이다. 이 두 차례의 방문은 자료 수집과 생존자 확인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조선과 별다른 마찰은 없었다. 조선은 셰난도어호에게 제너럴 셔먼호의 생존자가 없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하지만 사건은 이렇게 끝나지는 않았다. 1869년 취임한 미국의 제18대 대통령율리시스 S. 그랜트가 취임 연두교서에서 대외 팽창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임을 밝혔기 때문이다. 더욱이 1869년은 미국의 대륙 횡단 철도가 완성된 해이기도 했다. 미국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태평양 방면으로의 진출이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의 군비 축소로 인해 미국의 해군력은 매우 약해져 있었다. 때문에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복수라는 명분과 함께 적은 병력으로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판단한 조선을 대상으로 삼아 1871년 침략(신미양요)을 감행하게 된다.   




* 참고 문헌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후의 동북아 정세와 와츄세트호의 내항」, 박명수, 2021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영국」, 한승훈, 2021       

『신미양요』, 신효승, 2021       

『근대 조선과 세계』, 최덕수, 2021      

 『흥선대원군 평전』, 김종학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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