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알
산과 산이 포근히 감싸안은 골짜기 마을에 작은 초가집 한 채가 오롯이 서 있었습니다. 그 집엔 윤호라는 이름의 소년이 살고 있었지요. 호기심이 많고 손재주가 좋은 아이였습니다. 나뭇가지를 깎아 새총을 만들고, 돌멩이로 집 짓는 흉내를 내며, 온종일 들판과 마당을 뛰어다니곤 했습니다.
어느 날, 봄볕이 따스하게 내리던 오후, 윤호는 마당에서 구슬치기처럼 돌멩이를 던지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마당 한쪽에 동그란 무언가를 발견했어요.
“이게 뭐지?”
곧 알아차렸습니다. 동그랗고 울퉁불퉁한 껍질을 가진 갈색 알맹입니다.
“호두잖아!”
윤호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지요.
가을로 접어들자 어느새 호두가 아람을 벌었습니다. 아마도 제일 먼저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모양입니다. 병아리가 알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껍질이 고왔습니다. 윤호는 정성스레 만지다가 잠시 담장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며칠 후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오늘은 호두를 털어야겠군.”
윤호는 아버지를 도와 호두를 모으는 일을 했습니다. 일이 끝나자, 그 중에서 제일 작은 호두를 찾아냈습니다. 작은 손안에 감춰질 정도로 앙증맞습니다. 크기가 같은 두 개를 한 손에 쥐고 ‘바드득 바드득’ 소리가 나도록 굴렸습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입니다. 첫 번째로 주운 호두가 생각났습니다. 다행입니다. 다람쥐가 물어가지 않았군요. 먹고 싶은 마음에 돌멩이 위에 올려놓고 작은 돌멩이로 호두를 ‘탕탕’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단단한 껍질은 쉽게 깨지지 않았습니다.
“참 단단하기도 하네.”
윤호가 혀를 차며 돌로 내리치는 순간 호두는 그만 담 너머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밖으로 나가 두리번거리며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때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에이, 내일 찾아보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바깥은 폭우가 내리고, 천둥이 울리고, 차가운 흙탕물이 호두를 땅속으로 숨겨버렸습니다. 호두는 윤호와 빗물에 시달린 끝에 그날 밤, 땅속 깊은 곳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호두는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괜찮아. 여기 따뜻해. 언젠가 나도 세상 위로 올라갈 거야.”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습니다. 하얀 눈이 덮이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호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호두는 꿈꿨습니다.
“나무가 되어 하늘을 만나는 꿈.”
“새들이 내 가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꿈.”
“바람이 내 잎을 흔드는 꿈.”
그리고 다시 봄이 돌아왔습니다. 따뜻한 햇살이 땅속까지 스며들고, 녹은 눈물이 호두 껍데기를 적셨습니다. 그 순간, 단단했던 껍질이 ‘톡’ 하고 갈라졌습니다. 그 속에서 아주 작은 싹 하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지요.
“으, 세상은 생각보다 밝구나.”
작은 싹은 부끄럽게 햇살을 맞이했습니다. 바람은 그 싹을 흔들며 말했습니다.
“어서 와, 호두야. 기다리고 있었어.”
윤호는 어느 날 마당에서 초록빛 싹을 발견했습니다.
“이게 뭐지? 잡초인가?”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싹이 낯익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는 그 싹을 뽑지 않고 조심스레 주위의 잡초를 뽑았습니다. 둘레에는 줄기가 다치지 않도록 작은 돌무더기를 쌓아 울타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뒤로 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싹은 조금씩 자라나 줄기가 되었고, 잎이 퍼졌습니다. 그리고 몇 해가 흘러, 윤호가 소년에서 청년이 되었을 무렵, 그 자리에는 청년보다 몇 배나 키가 큰 호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나무는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린 듯 가지를 펴고, 넓은 잎이 바람에 사각사각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여름이 되면 새들이 찾아와 둥지를 틀었고, 아이들이 그 아래서 놀며 웃음소리를 퍼뜨렸습니다.
윤호는 어느 날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습니다. 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그 담장 밑에는 놀랍게도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습니다.
“이 나무는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그가 손으로 나무껍질을 쓰다듬는 순간, 부드러운 바람이 불며 잎사귀가 속삭였습니다.
“윤호야, 나야.”
윤호는 놀라며 고개를 들었습니다.
“네가, 설마 그때의 호두?”
잎사귀들이 살랑살랑 흔들리며 대답하듯 빛났습니다.
“그래, 네가 작은 돌멩이로 울타리를 쳐준 덕분에 나는 세상을 만났어.”
윤호는 미소 지으며 나무 아래 앉았습니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그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너를 몰라본 게 미안해, 작은 돌무더기를 쌓아준게 잘한 일이었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단다.”
나무는 바람을 타고 속삭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꿈꾼 시간도, 외로웠던 계절도 다 나를 자라게 했어.”
그날부터 윤호는 그 나무 아래 벤치를 놓았습니다. 지나는 이들이 쉬어가고, 아이들이 그 아래서 숨바꼭질했습니다. 가을이면 나무에서 호두가 떨어졌고, 사람들은 그 열매를 주워 따뜻한 호두과자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 맛은 신기하게도 달콤했습니다. 마치 세월의 시간과 기다림이 녹아든 맛이었지요. 해마다 나무는 조금씩 더 커졌습니다. 이제는 마을 어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나무를 “윤호나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묻곤 했어요.
“이 나무는 언제부터 있었어요?”
그러면 어른들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소년이 던진 호두 한 알에서 시작되었단다.”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어요.
“그럼, 우리도 호두를 심으면 하늘을 가리는 나무가 될까요?”
“물론이지. 다만, 꾸준히 기다려야 한단다.”
바람이 나무 사이를 지나가며 노래했습니다.
“모든 꿈은 작은 씨앗에서 시작된다.”
그 노래는 계절이 바뀌어도, 산을 넘어 마을을 지나,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