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알
저녁 바람이 살짝 스며드는 시골 마당에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낮에는 눈에 잘 띄지 않던 작은 흙 둔덕 하나가 노을에 물들었습니다. 그곳엔 이름도 모를 씨앗 한 알, 바로 ‘분씨’가 살고 있었지요. 분씨는 낮에는 잠을 자고, 밤이 되면 살짝 깨어났습니다. 햇살 아래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달빛이 뜨면 분씨는 마음속이 간질거렸습니다.
“오늘은 피어볼까? 아니야, 아직은 부끄러워.”
매일 밤 스스로를 다독이며 기다렸습니다. 그런 분씨의 바로 옆, 울타리 아래에는 하얀 고양이 한 마리와 귀뚜라미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고양이는 늘 새벽의 냄새를 맡으며 느릿느릿 걷는 걸 좋아했고, 귀뚜라미는 풀잎 위에서 세상의 소리를 노래로 바꾸는 일을 맡고 있었지요.
“야옹, 분씨야. 너는 언제 꽃을 피울 거니?”
고양이가 부드럽게 물었습니다.
“나도 보고 싶어. 네 꽃은 분명 달빛처럼 예쁠 거야.”
귀뚜라미가 딸랑딸랑 울음소리로 거들었습니다. 분씨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듯했습니다.
“아직은, 부끄러워. 낮에는 햇살이 너무 강하고, 밤에는 세상이 너무 조용해서, 모두가 나만 쳐다보는 것 같거든.”
고양이는 살짝 웃으며 눈을 감았습니다.
“괜찮아. 세상엔 그런 꽃도 있는 거야. 낮에 피는 꽃도 있고, 밤에만 피는 꽃도 있지.”
귀뚜라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노래했습니다.
“수줍은 건 나쁜 게 아니야. 그건 네가 마음을 아끼는 거야.”
그날 밤, 달이 유난히 밝았습니다. 별들이 촘촘히 박힌 하늘 아래, 고양이는 마당을 거닐고 귀뚜라미는 조용히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분씨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달님, 나도 언젠가 당신처럼 빛나고 싶어요.”
달은 조용히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좋아, 용기를 내어보렴. 너의 빛은 밖이 아니라, 네 안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거란다.”
그 말에 분씨의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하얗고 가느다란 잎이 천천히 움직이며 드디어 꽃봉오리를 펼쳤습니다. 밤공기 속에서 하얀 향기가 퍼졌습니다. 그 향기는 마치 분가루처럼 부드럽고, 달빛처럼 희미했지요.
고양이가 감탄하며 외쳤습니다.
“야옹! 이건, 정말 고운 향이야. 꼭 화장 냄새 같아!”
귀뚜라미도 즐겁게 노래했습니다.
“분씨야, 너, 마치 화장한 것 같아! 달빛이 너에게 분칠을 해주고 있어.”
분씨는 웃었습니다.
“정말? 그럼, 오늘은 나도 조금 예뻐진 걸까?”
“그럼그럼! 밤의 공주 같아.”
고양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분씨는 부끄럽기는 해도 꽃잎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날 이후, 분씨는 밤마다 꽃을 피웠습니다. 낮에는 다시 숨고, 밤이면 살며시 깨어나
하얀 향기를 뿌리며 달과 별, 고양이, 귀뚜라미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가을이 되어 바람이 서늘해지자, 분씨의 꽃잎은 점점 가늘어지고 작아졌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세상을 밝히는 존재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어느 날 밤, 달이 살짝 구름 뒤로 숨었습니다. 분씨가 물었어요.
“달님, 왜 숨으세요?”
달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너에게 빛을 조금 나눠주었거든.
이제는 너 혼자서도 빛날 수 있지 않겠니?”
분씨는 자신도 모르게 꽃 대신 검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건 향기가 남긴 꿈이었어요.
고양이가 그 열매에 콧잔등을 대보더니 웃었습니다.
“나 화장했어! 분씨 향기가 나지 않니?”
귀뚜라미가 장난스럽게 말했습니다.
“야옹, 세상에! 오늘은 우리 모두 밤의 무도회네.”
달빛 아래서 세 친구는 그렇게 웃고 또 웃었습니다. 바람은 살짝 불어와 분씨의 남은 향기를 울타리 너머로 실어 갔습니다. 그 향기는 이웃집 마당에도, 멀리 들판에도 흩날리며 속삭였습니다.
“밤에도, 조용히 피어나는 마음이 있단다.”
겨울이 다가오자 분씨는 조용히 잠들 준비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마당 가의 그 자리엔 봄마다 새싹이 돋았고, 해마다 밤이면 하얀 꽃이 피어났습니다. 그때마다 고양이는 그 옆에서 속삭였습니다.
“야옹, 분씨야, 너 또 화장했구나.”
귀뚜라미는 노래했습니다.
“수줍음 속에서도 세상은 빛난다.”
하늘의 달과 별들은 여전히 그녀의 친구였습니다. 그들이 빛을 보이면, 분씨의 꽃잎은 밤마다 조금씩 반짝였습니다.
그 하얀 향기는 지금도 바람에 실려 다닙니다. 어딘가의 울타리, 어딘가의 마당 가에서, 조용히, 아주 수줍게 피어나는 하얀 꽃 한 송이로 밤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