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알
햇살이 반짝이는 늦은 봄의 아침입니다. 작은 시골 마을의 언덕 위에 조그만 집에 소녀 한 명이 살았습니다.
이름은 송나.
송나는 언제나 맨발로 다니며, 바람 따라 웃는 아이였습니다. 그녀의 머리는 볕에 그을려 살짝 갈색빛이 돌았고, 눈동자는 호수처럼 반짝였습니다. 송나는 마당 한편에 작은 화분을 하나 두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빨간색도, 초록색도 아닌 작은 씨앗 한 알이 잠들어 있었어요.
그건 봄날 학교 앞에서 선생님이 나눠준 방울토마토 씨앗이었어요. 처음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매일 물을 주고 노래를 불러주자 며칠 뒤 작은 초록 싹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와, 안녕! 드디어 깨어났구나!”
송나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습니다.
그날부터 그녀는 매일 아침 싹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잘 잤어?”
“오늘도 예쁘게 자라야 해.”
송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네가 빨갛게 익는 날, 제일 먼저 먹을 거야.”
그렇게 싹은 나날이 자라나 줄기가 되고, 잎이 되고, 이윽고 작고 하얀 꽃이 피어났습니다.
그 꽃잎은 햇살을 머금은 듯 투명했고, 바람이 불면 살짝 흔들리며 웃는 것 같았어요. 송나의 친구들이 그 모습을 보러 왔습니다. 먼저, 하얀 고양이 ‘초코’가 꼬리를 살랑이며 다가와 말했어요.
“야옹, 이건 뭐야? 먹는 거야?”
그러자 송나가 웃었습니다.
“아니, 아직은 아기야. 먹으면 안 돼.”
마루의 또 다른 친구, ‘몽이’ 강아지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죠.
“음,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송나는 손으로 화분을 감싸안으며 말했어요.
“얘는 아직 꿈꾸는 중이야. 깨우면 안 돼.”
그때, 인형 ‘루루’가 바람에 흔들리며 나직이 속삭였습니다.
“송나야, 저 꽃이 떨어지면 슬프지 않아?”
송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웃었습니다.
“응, 하지만 꽃이 떨어져야 열매가 열리는 거래.”
루루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럼, 떨어지는 것도 필요하구나.”
며칠 뒤, 정말로 꽃잎들이 하나둘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송나는 그것들을 모아 작은 병에 담아 창가에 두었습니다.
“이건 네가 웃었던 흔적이야.”
그 자리엔 동그란 초록 구슬 같은 방울들이 맺혔습니다.
햇살이 닿을 때마다 방울들은 반짝이며 속삭였어요.
“우린 자라고 있어.”
“햇살이 따가워도 괜찮아.”
“송나가 웃으면 우리도 힘이 나.”
시간이 흘러 여름이 깊어질수록 방울들은 점점 붉게 물들었습니다. 빨갛게 익은 토마토는 마치 작고 반짝이는 별 같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해가 질 녘 바람이 노랗게 물든 순간, 송나는 화분 앞에서 놀라 입을 막았습니다.
“우와… 정말 예쁘다.”
그때입니다. 토마토들이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하나둘씩 작은 목소리를 냈습니다.
“송나야, 고마워.”
“너 덕분에 우리 이렇게 자랐어.”
“오늘은 별빛처럼 붉은 밤이 될 거야.”
송나는 놀라 인형, 고양이, 강아지를 돌아봤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놀라지 않았어요.
오히려 초코가 말했습니다.
“난 알고 있었어. 얘네는 말하는 열매들이야.”
몽이는 꼬리를 흔들며 덧붙였죠.
“너무 조용해서 티가 안 났을 뿐이지.”
그 순간, 마당 가득 바람이 불었습니다. 바람은 토마토 가지를 살짝 흔들며 노래를 부르는 듯했어요.
“흙 속에서 꿈꾸던 씨앗이 햇살을 먹고, 비를 마시며 이제는 세상에 웃음을 나누네.”
송나는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람은 따뜻했고, 하늘은 분홍빛으로 물들었습니다. 그녀는 조심스레 한 알의 방울토마토를 따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너무 예쁘다.”
그때, 작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먹어도 돼. 나, 이제 준비됐어.”
송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웃었습니다.
“그럼, 고마워.”
그녀는 천천히 한입 베어 물었습니다. ‘톡’ 터지는 소리와 함께 달콤한 향이 입안 가득 퍼졌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마루의 눈앞에 여름의 장면들이 스쳐 갔습니다. 첫날의 씨앗, 싹이 움튼 봄날, 꽃이 피고 떨어지던 오후, 고양이 초코와 강아지 몽이가 노닐던 마당, 그리고 루루가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 모든 기억이 토마토 속에 들어 있었다는 걸, 송나는 깨달았습니다.
“정말, 네 안에 봄, 여름이 다 들어있구나.”
밤이 되자 별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그날따라 하늘의 별들은 꼭 방울토마토처럼 보였어요. 송나는 창가에 앉아 루루에게 속삭였습니다.
“오늘은 하늘이랑 땅이 닮았네.”
루루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건 아마, 네 마음이 여름을 품고 있어서일 거야.”
그때 송나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제 이 화분을 마당에 옮겨 심을까?”
그녀는 신중히 화분을 품에 안고, 마당 구석 흙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초코와 몽이가 옆에서 지켜봤어요.
“또 새로운 여름이 오겠네.”
“그럼 내년에도 방울토마토랑 놀 수 있겠다.”
송나는 웃으며 씨앗 몇 알을 손에 쥐었습니다. 그건 그녀가 먹은 토마토 속에 있던 씨앗들이었지요.
“이 아이들이 또 다른 꿈을 꿀 거야.”
그녀는 손바닥을 펴고 씨앗들을 흙 속에 묻었습니다. 달빛이 그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습니다. 토마토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 멀리 퍼졌습니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마루네 마당을 지나며 종종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마루야, 우리 잘 자라고 있어!”
“햇살 맛이 좋아!”
“이번엔 더 달콤해질 거야!”
물론 송나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요. 왜냐하면 그녀는 알고 있었거든요. 토마토는 봄, 여름을 기억하고, 여름은 꿈꾸는 아이의 마음속에서 다시 자란다는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