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해가 완전히 꼬리를 감추었을 때야 큰할머니 댁에 도착했습니다. 벌써 저녁 준비를 해 놓으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행사이니 말 안 해도 기별을 안 해도 올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두워지는 동네의 모습은 절간과 같다고 하면 맞겠지요. 골짜기를 따라 좀 높은 언덕바지에 띄엄띄엄 자리 잡은 초가집, 그 사이사이에 촘촘히 들어서 있는 감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잣나무, 호두나무 등. 저마다 열매를 한껏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가을의 풍요로움을 자랑합니다. 이런 과일나무들은 자랑 못지않게 아무에게나 인심을 베푸는 것으로 자신을 뽐내는지도 모릅니다. 탐스럽게 달린 열매들을 보고 그냥 지나치기가 서운해서 하나를 뚝 딴다 해도 말이 없습니다. 두 개를 딴다 해도 세 개를 딴다 해도. 주인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나무들을 닮았나 봅니다. 보지 못했어도 보았어도 말이 없습니다.
“좀 더 따 가지고 가지.”
하는 말속에 우러나는 정겨운 마음씨는 늘 순박한 자체입니다. 그렇다고 따 가지고 갈 생각이 없습니다. 가지고 가는 게 더 귀찮습니다. 우리 동네에 가도 마찬가지로 정겨운 마음씨가 열매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벌써 반딧불 같은 등잔불들이 조그만 방문으로 새어옵니다. 큰 할머니 댁에서부터 시작한 인사는 아랫집 아랫집으로 이어집니다. 문밖을 나오면서 하늘을 쳐다보곤 나는 늘 새로운 사실을 느끼곤 합니다.
‘이렇게 쉬운 것을.’
그렇습니다. 석지골은 나에게 헤아림의 단순함을 알려줍니다. 어느 곳부터 헤아릴까 하는 고민도 없고, 헤아리다 빠뜨릴 서운한 별들도 없을 테고.
높은 산봉우리가 사방을 가로막은 하늘은 조금만 옹달샘처럼 구멍이 빵 뚫렸습니다. 구멍 위로 여남은 개의 별이 빛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 집 마당에서보다도 더 밝은 별이 더욱 가까이 내려앉았습니다. 작은 할아버지 댁 좁은 마당 한가운데 달빛을 머금고 붉게 익어 가는 석류보다도 더 밝고 더 곱게 느껴집니다.
이슥한 밤이 되어서야 겨우 인사를 마치고 길을 나섰습니다. 호로병 같은 동네 입구를 빠져나오자 길은 동아줄을 사려놓은 것처럼 굽이굽이 이어집니다. 심한 오르막길은 없어도 심한 내리막길은 없어도 산모퉁이를 돌고 아주 큰 바위 밑은 돌고 내를 따라 돌고 건너기를 수십 번이나 반복해야 집에 도착합니다.
“너무 늦었지?”
“좀 늦었는데요.”
“어머니께서 걱정하시겠는걸.”
“내년부터는 좀 서둘러야 할 것 같아요.”
그렇지만 내년도 마찬가지라고 짐작합니다. 해마다 호로병 같은 입구를 빠져나오면서 습관처럼 하는 말들이니까요. 시간을 단축한다는 게 어차피 별 의미가 없을지 모릅니다. 할머니께서 걱정하지겠지만, 할아버지를 뵈었다는 일만으로도 족할 테니까요.
“왜 이렇게 늦었니? 힘든데 잘 다녀왔다.”
할머니도 알고 계시니까요. 젊었을 때는 늘 할아버지를 따라 아버지 형제들을 이끌고 힘든 발걸음을 하셨을 테니까요.
한 굽이를 지나자, 콩밭 사이로 수수들이 길게 목을 내밀고 달빛에 목욕하고 있습니다. 머리가 무거워 어느새 목을 반쯤은 숙이고 예의 바른 아이처럼 서 있습니다. 내 뒤를 따라 달이 따라오고 별들도 가로막은 산봉우리를 넘어 천천히 따라옵니다. 별들이 나타났단 사라지고 사라졌단 나타나고, 숨바꼭질 대장입니다. 헤아릴 때마다 있다간 없어지고 없다가 나타나는 별들입니다. 달도 종종 몸을 숨기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수수밭을 지나 개울을 건너자, 장구먹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아주 가파른 고갯길, 오르는 사람마다 노인네처럼 허리를 구부리지 않고는 오를 수 없는 길.
어느 해인가 장구먹을 지나다가 지게를 지고 고개를 오르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허리를 구부린 까닭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짐만 힘겹게 오르는 모습을 멀리서 보았습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세요?’
짐을 지고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병풍 위를 오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구먹에는 가본 일이 없습니다. 다만 동네는 사람들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고개를 넘으면 장군(목이 좁은 항아리)처럼 동네가 넓게 펼쳐져 있다는데 항상 집은 아홉 채라 나요.
장구먹에는 이상한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장구먹 아홉 집은 오랜 옛날부터 어느 마을보다도 늘 걱정 없이 살아간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살기 좋은 동네라고 생각한 어떤 사람이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살았는데 그만 그중 한 집에 불행한 일이 생겼다나요. 결국 한 집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고 뒤로도 계속되어 나중에는 결코 그 마을로 이사를 가는 집이 없었답니다. 물론 이사를 하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겠지요, 산세가 험한 동네임에 틀림없습니다. 6·25때도 전쟁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지나갔다는 동네랍니다.
개울을 건너 기전 절벽 바위 아래에서 모두 엎드려 흘러가는 물을 한 움큼씩 집어 목을 축였습니다. 조금은 서늘한 밤공기이지만 머리를 맑게 해줍니다. 바위에 부딪쳐 반사되는 달빛에 개울물은 눈을 반짝이며 정답게 소곤소곤 우리들을 앞질러 흘러갑니다.
“가야지.”
모두 일어섰습니다. 다시 절벽 바위를 세 곳이나 돌고 흘러가는 개울물을 몇 개나 건넜습니다. 달도 어느새 따라왔는지 미소를 머금은 채로 우리들 앞을 지나갑니다. 빨리 따라오라는 신호가 아닐까요?
소반짐에 이르자 절벽 아래로 개울물의 반짝임이 별보다 더 진합니다. 건너편 아저씨 댁의 방문으로 등잔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옵니다. 조금은 넓은 개울을 띄엄띄엄 버팀목을 하고 나무다리가 길을 안내합니다. 하지만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늦은 밤이라서, 서운하기는 해도 다음을 기약해야 합니다.
목화꽃이 집 주위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꼭 흰 눈이 내려 주위를 덮어 버린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누군가가 목화밭에서 뛰쳐나와 하늘로 오를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갑자기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의 두레박이 있다면 아마도 이곳에 있어야 할 것만 같습니다. 처음으로 좀 넓은 세상을 구경했는가 싶었지만, 산모퉁이를 돌면 내를 조금은 멀리하고 다시 길이 좁아집니다.
서리실에 이르렀습니다. 다리가 아프고 졸음이 밀려옵니다. 걸음이 뒤처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리 아프지?”
“아니.”
뛰어가서 중간에 끼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뒤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안되겠다. 업혀.”
“괜찮은데······.”
몇 발짝 걷다가 좀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 삼촌 등에 업혔습니다. 서리실을 지나며 나무에 탐스럽게 달린 모과를 보았습니다.
‘내일 학교에 가면 석호한테 모과를 달라고 부탁 해야지.’
다시 하늘을 한 번 올려 보고 삼촌의 등에 머리를 기댔습니다. 잠이 스르르 밀려옵니다. 으름, 다래, 머루, 과일, 수수, 목화, 달과 별을 가슴에 꼭 안은 채로 이 밤은 그렇게 깊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