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동네 작은 아이

16. 호두

by 지금은

봉남이가 왔습니다.

“야, 꼴 베러 가자.”

“싫어.”

“딸기 따 줄게.”

“싫어.”

“그럼.”

“호두 까주면.”

“아직 호두는 여물지 않아서 따면 안 되는데, 할 수 없지.”

“'꼭'이다.”

“그래, 약속.”

봉남이는 호야보다 나이가 훨씬 위입니다. 호야는 겨우 일곱 살이지만 열다섯이나 됩니다. 그렇지만 형이라고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왜냐고요?’

봉남이는 원래 우리 동네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친척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봉남이가 우리 동네에 온 것은 2년 전입니다. 부모 없는 고아랍니다. 장에 갔던 방앗간 집 아저씨가 불쌍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왜 불쌍하냐고요?’

그야 엄마와 아버지도 없지만 시장에서 거지처럼 다니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른 봄철이라서 바람이 어찌나 매섭게 부는지 이발소 옆에 쭈그리고 벌벌 떠는 모습이 안 돼 보였다나요. 음식점에서 국밥을 먹이고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일은 잘할 줄 모르지만 먹여 주고 재워만 주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돌봐주려고 했습니다. 불쌍해서 따스해지는 늦은 봄까지만 이라도 데리고 있으려고 했습니다. 봉남이가 먼저 말을 꺼내니 잘됐다 싶어 잔심부름이나 시킬 생각입니다. 작고 가냘픈 모습은 2년이 지났지만, 처음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래도 시키는 일을 열심히는 하려고 하니 마음이 너그러운 아저씨는 자식이나 동생쯤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봉남은 혼자 꼴 베러 가기가 심심했나 봅니다. 호두를 까주고 산딸기도 따 준다고 호야를 꾀였습니다. 호야는 봉만을 졸랑졸랑 따라갑니다.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아서 밭두둑을 지나 논두렁길로 가는 동안 종아리를 스칩니다.

“호야야, 학교 가는 거 재미있니?”

“아니.”

“왜?”

“너무 멀어서.”

“그렇기는 하다.”

“갔다 왔다 삼 십리는 족히 되겠지?”

“잘 모르겠는데 우리 삼촌이 그러던데.”

“그래 맞아, 너희 삼촌은 안 가 봐도 안 봐도 다 아는 분이니까.”

봉남은 호야 삼촌을 좋아합니다. 몸이 불편하여 집안에만 있고 동구 밖을 나가 본 적이 없지만 아는 것이 많고 상상력도 풍부합니다. 봉남이가 속상한 일로 가끔 삼촌에게 하소연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삼촌은 봉남이의 기분을 말끔히 풀어 주고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가게 합니다.

“해님은 왜 하늘에 살까?”

“너무 뜨거워 사람들이 만지면 손이 타버릴까 봐.”

“그렇겠지.”

“그럼, 개중에 제일 큰 개는 무엇인지 아니?”

“그거야 쉽지, 안개.”

호야는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좀 어려울걸,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거미는?”

“그렇게 쉬운 것도 몰라? 땅거미.”

호야도 지기가 싫었습니다.

“가위 중에 제일 큰 가위는?”

“한가위.”

“그럼, 조금 나온 것 보고 쑥 나왔다고 하는 것은?”

“쑥.”

“나왔는데도 못 나왔다고 하는 것은?”

“못.”

아는 것을 말했지만 봉남을 당해 낼 자신이 없습니다. 이제는 마지막 수단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팔칠은?”

“팔칠이 뭔데? 사람 이름.”

“팔칠이오십육. 곱하기 말이야.”

“그런 건 모른다.”

한참 신이 나던 봉만은 그만 풀이 죽었습니다. 학교에 다녀 본 적이 없습니다. 누구에게서 배워 본 일도 없습니다. 호야는 항상 불리하다 싶으면 구구단이나 덧셈과 뺄셈을 말합니다.

“내가 이겼으니, 아침에 한 약속은 지켜야지.”

“누가 보면 어떻게 하라고, 보나 마나 나는 매를 맞을 텐데.”

봉남은 걱정이 됩니다. 의지할 곳 없는 봉만은 종종 동네 사람들과 친구들에게 맞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약속은 지키려 합니다.

호두나무 가까이에 다가가자 둘레둘레 주위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자 앉아.”

봉남은 빈 꼴지게를 내려놓았습니다. 호두나무 가지에 매달린 호두를 낫으로 툭툭 쳐 내렸습니다. 열 개를 까 주기로 약속했는데 여섯 개만 따 내렸습니다. 작년에 먹어 보고 못 먹어 본 호두니 다섯 개만 해도 족합니다. 봉만은 낫 끝으로 능숙하게 호두를 반으로 갈라 속을 도려냈습니다.

“먹어.”

“너도 먹어.”

“아니야, 약속대로 하면 열 개인데 다섯 개만 하자.”

“그래.”

봉만은 부지런히 두 개를 까서 호야에게 주었습니다.

“맛있니?”

“응.”

“얼마나 맛있니?”

“아주 많이.”

목소리가 이상해서 얼굴을 돌렸습니다.

‘어이쿠, 호랑이 할아버지.’

“이 녀석들 아직 여물지도 않은 호두를 벌써 까고 있어? 이 녀석, 네가 까 달라고 했니?”

“아뇨, 먹기 싫은데 봉남이가 자꾸만 까 준다고 해서.”

호야는 엉겁결에 봉남에게 책임을 돌렸습니다.

“이 녀석이, 조그만 애를 데리고 무슨 수작이야, 애가 뭘 배우겠어, 이 멍청한 바보 같은 놈.”

갑자기 호랑이 할아버지의 손이 봉만이의 뺨을 때렸습니다.

그러자 봉만은 하던 습관대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엉덩이를 하늘로 올린 채 머리를 땅으로 처박았습니다. 이윽고 발길이 엉덩이로 가자, 봉만은 그만 논 아래 웅덩이로 굴러 버렸습니다.

“얘야, 저런 놈은 따라다니면 안 되는 거야. 잘못하면 호야 너도 똑같은 놈이 된다.”

호야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엉거주춤 일어섰습니다.

호랑이 할아버지가 돌아간 후에야 봉만은 논두렁 밑에서 모습을 보였습니다. 얼굴이 벌겋게 부어올랐습니다. 눈에는 눈물이 흥건히 고여 있습니다. 나지막하게 흐느끼는 느낌이 아직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 엄마, 아버지만 있으면 나도 학교에 다니는 건데.”

“미안해”

“호야 너, 걱정할 것 없어. 모두 다 내 탓이니까.”

봉만은 냇가에 이르자 옷을 벗어 물에 헹구고 몸도 헹구었습니다.

드디어 봉만이의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뜸북뜸북 뜸부기, 논에서 울고.’

“나는 호야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래도 너와 나는 말동무가 될 수 있으니까.”

봉만이의 노래가 자꾸만 슬퍼집니다.

‘호야는 나쁜 놈 나쁜 놈 몹시 나쁜 놈.’

봉만이의 노래 속에 자꾸만 스며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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