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낯선 오늘 20230927
어제의 오늘이 모이고 모여 오늘이 옵니다. 그러고 보니 매일 맞이하는 오늘은 처음입니다. 새벽에 눈을 떴습니다. 처음 맞이하는 오늘입니다. 매일 같이 앞을 향해 걸어왔지만 가야 할 오늘은 어제와 다름없이 처음입니다.
책을 열었습니다.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손에 잡았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배우기 시작한 외국어가 아직도 머리에 남아 버릴 수가 없습니다. 틈나는 대로 매달리고 잊어버리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잠시 진척도 있었지만, 퇴보도 함께 했습니다. 중학교 때 부지런히 익힌 문장이나 단어가 이제는 희미하게 살아남아 뿌연 안갯속에 가끔 마음을 애태웁니다.
제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능력 외의 것을 익히려 했다는 생각에 퇴직하고 시간의 여유가 생기자, 내 수준을 낮췄습니다. 고등학교 수준의 영어에서 중학교 수준으로, 다시 초등학교로, 이마저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력이 부족했던 이유일까요. 최대한 기준을 낮추기로 했습니다. 유아의 언어부터 시작할 생각입니다.
도서관의 어린이 영어책 도서 판매대에 들렸습니다. 단어 몇 개가 있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그림과 단어를 들여다보면서 우습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이것을 볼 수준은 아니지.’
다음 그림책을 펼쳤습니다. 전체의 페이지 중 역시 몇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모두가 그림입니다. 페이지를 넘기다 멈칫했습니다.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우습게 보이는 단어가 잠시 내 눈을 멈추게 했습니다. 모르는 단어입니다.
슬며시 스마트폰을 열어 단어를 검색했습니다. ‘오디(mulberry)’라는 글자입니다. 내가 그동안 영어를 접하면서 처음으로 맞이한 단어입니다. 어느 곳의 꼬마 아이가 입에 달고 있을 낱말이 나에게는 생소합니다. 문화의 차이며 글자의 다름입니다. 몇 개의 그림책 장을 넘기다 우습게 보다가 큰코다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리다고 만만히 볼일이 아니며 작다고 깔볼 것도 아닙니다. 새로운 모든 것이 어렵게 느껴지지만 외국어는 더 어렵게 생각됩니다. 이제껏 수십 년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결과는 측정 불가입니다. 다시 초등학교에 입학을 해야 할까요? 나이를 되돌릴 수 있다면 영어권의 나라에 가서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은 쉽겠지만, 외국에 가보지 않은 사람도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간을 많이 투자한 결과라 여겨집니다. 나로 말하면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언어 습득에 투자한 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알면서 뭘 이야기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답답해서 하는 말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영어 책, 중국어 책, 일본어 책, 스페인어 책 등을 줄줄 읽고 언어 구사도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말을 빼고는 이 모두가 낯섦입니다.
나는 늘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많은 나라 사람이 사용하는 공용어를 하나만이라도 맘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외국 여행을 수없이 다녔을 텐데 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숙소를 잡는다든가, 먹을 것, 이동 중에 낯선 곳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나라에서야 말이 통하니 별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낯선 나라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으면 나의 활동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매일 다른 오늘을 맞이하고 그 속에서 하루를 끝내다 보니 ‘오늘’이라는 낱말이 친숙합니다. 지금까지 오늘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할 때는 초등학교 시절입니다. 쓰고 싶은 일기는 아니었지만, 숙제로 매일 써야 했습니다. 일기장에는 늘 빠짐없이 사용하는 말이 ‘나’와‘오늘’입니다. 선생님은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매일 같이 내가 쓰는 일기이니, ‘나’라는 말과 ‘오늘’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된다.”
일기장 맨 윗줄에는 친절하게도 날짜와 요일, 일기까지 기록할 수 있도록 쓰여 있습니다. 아이들이 고칠 생각을 하지 않자, 다음 월요일에는 일기장 검사를 해서 ‘나’, ‘오늘’이라는 낱말이 보이면 단단히 혼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두 친구가 쓰지 말라는 말을 썼습니다.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을 지으셨지만, 꿀밤 한 개로 끝났습니다.
나는 낯설어서 난처한 경우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낯선 곳에서 입니다. 특히 외국에서 길을 잃었을 때입니다. 짧은 외국어 실력으로 더구나 상대도 그럴 경우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마음먹은 대로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체코에서의 일입니다. 아침에 산책하러 나갔는데 무작정 걷다가 방향을 잃었습니다. 진땀을 빼며 만국 공통어를 사용하고 나서 녹초가 되었습니다. 낯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입니다. 서먹서먹한 데다 말수가 서로 적을 경우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시선을 외면하고 있을 때, 몇 분의 시간이 수십 년은 더 한 느낌입니다.
우리는 낯섦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새로운 날입니다. 지금은 새로운 시각입니다. 나는 지금 그 위에 서 있습니다. 익숙한 오늘이면 좋겠습니다. 남은 항해가 순조롭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