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배울 것이 많아서 20220123
악보집을 찾다가 한자 파일을 발견했습니다. 언제 만들어 놨는지 모릅니다. 펼쳐보니 정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낱말 하나하나에 음과 훈을 달아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틈틈이 익힐 만합니다. 주머니에 쏙 들어가 휴대하기도 편합니다.
한자 구급부터 일급까지의 낱자들입니다. 천천히 읽어갔습니다. 자연스레 눈으로 스쳐 지나갑니다. 그러고 보니 몇 해 동안 한자 공부에 미치다시피 했습니다. 학창 시절 영어단어를 왼다고 단어집을 만들었을 때보다 더 정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길에서도 차 안에서도 손에 쥐고 낱자를 익히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나는 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으로 주위에 인식되었습니다. 남들에게 그렇게 보일 뿐 정작 내 속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갔지만 주위의 동료들과는 확연히 실력의 차이를 드러냈습니다. 공부한다고 공상하며 시간만 때운 것은 아닌지 스스로 의심이 되기도 합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의 습득한 실력은 철도에 관한 내용이 전부입니다. 국·영·수를 비롯한 인문계 과목과는 거리가 먼 책을 집중적으로 가까이해야만 했습니다.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에 기술 과목을 등한시하며 입시에 필요한 공부를 했다고는 하지만 독학의 수준을 넘지 못했으니 나 자신 실력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실력이 개뿔이구먼.”
남들의 말에 인정했습니다.
대학에 겨우 입학은 했지만, 첫 시간부터 얼굴이 화끈거리는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인문 교양 시간에 우리 문학사를 공부했는데 지면에 한자가 많습니다. 그날따라 예습하지 못했습니다. 차례가 되어 글을 낭독하는 순간부터 말이 더듬거리며 입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한자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그 후로 유야무야 지나갔습니다.
형님은 나와는 달리 한문 실력이 높습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도 필력이 좋다고 인정을 받은 터입니다. 그러니 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나 또한 형님만큼이나 실력자인 줄로 착각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모르는 글자를 물어올 때는 그저 난처했습니다.
학교에서의 일입니다. 내가 담임한 아이가 교실에 들렸습니다. 방과 후 한자 공부를 하고 책상 속에 빠뜨린 물건이 있어 가지러 왔다고 했습니다.
“선생님. 이 글자 뜻 아세요.”
“‘고기 어’지 뭐야.”
“아뇨, ‘고기 잡을 어’ 예요. 선생님 쉬운 것도 모르시네요.”
“아, 맞아.”
삼수변이 없고 있고의 차이입니다. 얼굴이 화끈했습니다. 애써 낯빛을 감추었습니다.
그 후로 한자를 익혀야겠다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꾸준히 해야겠다고 궁리했습니다. 혼자 하다가는 얼마 가지 못해 포기할 것 같아 아침 자습 시간에 반 아이들과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한자 급수 책을 마련했습니다. 아이들과 하루에 두세 자 익히기로 했습니다. 퇴근하기 전에 칠판의 한 귀퉁이에 쉬운 한자의 음과 훈부터 적어두었습니다.
‘아침에 교실에 들어오면 열 번씩 쓰며 익히기’
이 시간은 아이들과 동등해지는 시간입니다. 학생들에게 부담을 주는 정도는 아니어서 좋지만, 이 정도의 한자를 익히는 것으로는 내 성미에 차지 않았습니다. 이왕 시작했으니 일급 정도의 실력은 갖추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한자 사전 정도에 이르는 단어장을 만들고 급수 파일도 준비했습니다. 손안에 쏙 들어옵니다. 한자 시험을 봐야겠다는 마음에 몰입했습니다. 그렇다고 정말로 시험을 본 것은 아닙니다. 어찌 된 일인지 생각뿐 계획은 뒤로 미루어지기만 했습니다. 어느덧 손을 놓은 지 오래됐습니다.
내가 복지관에서 평생학습을 하는 동안 우연히 봉사활동의 제안을 받게 되었습니다.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자기의 특기를 전수해 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기에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의 정규 과목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글쓰기, 독서지도, 리코더나 오카리나 다루기, 색종이 접기를 지도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한자 자격증을 이 기회에 따고 싶었습니다. 막상 다시 한자를 대하고 보니 실력이 많이 줄었습니다. 육 개월 동안 다시 익히기를 반복하고 시험에 응시했습니다. 일급을 목표로 했지만, 기준을 낮추었습니다. 삼 급에 쉽게 합격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봉사활동의 기회는 미루어졌지만, 생각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내가 공부하고 있는 시간에 다시 한자를 포함해야겠습니다. 실력 있는 한자 봉사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일 급 정도는 되지 않아야 할까 합니다. 남에게 말하기도 편합니다. 파일을 책상에 놓았습니다. 영어 회화를 익히는 것처럼 틈틈이 익혀야 합니다. 그렇다고 스트레스랑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기회가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나의 일과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되었습니다.
‘왕초보 영어 회화’
시계의 시침이 일곱 시를 가리키면 어김없이 텔레비전에 눈이 갑니다. 코로나가 물러가면 평소에 생각했던 발트 삼국을 돌아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