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어느 날
84. 노을이 물드는 저녁 20221021
창밖의 하늘은 어제만큼 맑지 못합니다. 갑작스러운 미세먼지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루 종일 집안에 갇혀있다 보니 답답한 생각에 마스크를 썼습니다. 내 생각과는 달리 놀이터에는 꼬마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놀고 있습니다. 아이 엄마들의 재잘거림이 아이들의 동작만큼이나 활기를 띱니다.
좀 떨어진 돌의자에 앉아 주머니에서 가래호도를 꺼냈습니다. 하나입니다. 바각바각 소리를 냅니다. 화강암 바닥에 호도가 갈리는 소리입니다.
하나, 둘…… 마흔아홉, 쉰.
호도가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겨갔습니다. 다시 숫자를 고만큼 세기 시작합니다. 멍 때리는 시간입니다. 숫자를 세는 동안 저리던 어깨의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기보다 잊었다고 해야겠습니다. 손 바뀜이 이어집니다. 내 행동이 이상해 보였을까요. 지나치는 사람마다 힐끔 쳐다봅니다.
‘내가 뭐 어때서, 나 노는 것 아니거든.’
손에 힘을 더 주었습니다. 호도가 갈리는 마찰음이 더 커지는 듯합니다. 무늬를 만드는 중입니다. 갈다 보면 속의 무늬가 점차 나타나고 또 다른 무늬가 나타납니다. 원하는 무늬를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 갈림이 필요합니다. 한 개의 무늬는 얻었고 또 다른 한 개의 무늬를 얻기 위해 방금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내 손에 노란 물이 들었습니다. 웬 노란빛이 하는 순간 눈이 빛의 띠를 따라갔습니다. 어느새 나무 사이로 노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할 일을 바꿔야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집에서 나올 때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휴대전화를 꺼냈습니다. 노을의 풍경을 찍어야 합니다. 해넘이까지는 내 발걸음이 걷다 멈추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멋진 사진을 찍어 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새벽이면 자주 서는 위치로 갔습니다. 휴대전화를 들었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대로변으로 나갔습니다. 퇴근 시간이라 차들이 차도를 가득 메웠습니다. 한가하던 횡단보도 앞에도 많은 사람이 몰려 빨간 신호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초록 불빛이 되면 내가 염려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건널 것입니다. 건너편 큰 건물 위로 구름이 드리웠습니다. 조개구름입니다. 흰 조개들이 줄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널려있습니다. 도시의 어느 할머니가 빨간 풋고추를 줄지어 늘어놓은 듯 가지런합니다. 내가 고추의 사진을 찍자, 그녀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습니다.
“좋아 보여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많이 찍으세요.”
나는 노을에 곱게 물든 조개구름을 놓칠 수가 없습니다. 먼저 사람들과 건물과 차들과 하늘을 한 화면에 담았습니다. 신호에 막혔던 차들이 지나갔습니다. 초록 불빛에 기다렸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횡단보도를 건넜습니다. 몇 장의 화면으로는 아쉽습니다.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인도에는 자전거를 탄 사람이, 어깨동무한 남녀가 지나갑니다. 아이를 무동 태운 사람도 지나갑니다. 건물을 물들이는 노을빛이 반사되어 인도를 덮었습니다. ‘찰칵찰칵’ 내 휴대전화가 눈을 깜빡입니다.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드디어 아파트 중앙통로가 물들었습니다. 새벽의 촬영장소로 갔지만 마음을 거두었습니다. 일출과는 달리 일몰에 풍경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방향을 바꾸자, 연못에 큰 건물이 잠겨있습니다. 노을 진 하늘도 담겼습니다. 일렁이는 물결에 건물이 구름이 바르르 떨고 있습니다. 촬영된 사진을 보니 실물보다 더 멋집니다. 수묵담채화를 연상시킵니다. 오늘은 이거야 하는 생각에 위치를 조금씩 바꾸어 보았습니다. 산책을 하는 사람의 뒷모습도 함께 담았습니다.
땅거미가 내릴 모양입니다. 그 멋진 빛이 힘을 잃었습니다. 다 갈리지 않은 호두를 갈아야 합니다. 원하는 무늬를 얻으려면 며칠은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시간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조금 전의 자리로 옮겨가 마음 편하게 돌 위에 앉았습니다. 호두를 돌 위에 마찰시키자 잊었던 음이 살아납니다. 내가 손을 바꾸는 동안 몇 사람이 지나쳤습니다. 앞에서 사람들처럼 ‘힐끗힐끗’ 눈치를 봅니다. 소리가 마음에 걸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걸음마를 떼는 아이가 아장아장 그의 엄마 손에 매달려 다가옵니다. 아기는 내 행동이 신기해 보였나 봅니다. 엄마가 손을 잡아끌어도 두어 걸음 앞에 멈추어 떠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잠시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호도를 놓고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가렸습니다.
“까꿍.”
미소와 함께 가렸던 손을 떼자, 아이의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내 감춰진 얼굴이 드러나자 어리둥절한 표정입니다. 다시 얼굴을 가렸습니다. 손을 떼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이가 표정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까. 내 미소를 가져갔습니다. 몇 차례 반복되자 아이의 입이 방글거립니다.
너무 길면 재미가 없습니다. 손이 호도로 옮겨가고 내 고개가 돌 위로 옮겨졌습니다. 슬며시 눈치를 보니 엄마는 아이 손을 잡고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이제는 나도 집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이백 번만 갈고 끝내기로 했습니다. 내가 백번 정도 손을 움직였을 때입니다. 아이가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나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까꿍.”
대여섯 번의 반복이 이루어졌습니다. 내 입이 방긋했습니다. 아이의 입이 방글거립니다. 친구라도 된 느낌입니다. 엄마의 입도 아이의 입을 따라 방긋거립니다. 길면 재미가 반감됩니다. 일어나 ‘안녕’하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건물의 옥상에 겨우 붙어있던 노을이 구름에 안겨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