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때로는 당당하게 20221021
그림 전시회에 갔습니다. 요즈음은 마음만 먹으면 이곳저곳에서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가을의 맛 중에 이것도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실내든 밖이든 가을은 볼거리가 많습니다. 단풍, 꽃, 하늘, 옷차림…….
이곳의 전시회 작품은 내가 좋아하는 그림들입니다. 소품들이지만 아이들의 순진한 표정들이 마치 동화 속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그림을 모아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실내를 한 바퀴 돌고 다시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자, 실내에서 지켜보던 분이 다가왔습니다. 말을 걸지도 않았는데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이며 그림의 이미지를 설명해 줍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색다른 표현의 작품 앞에서는 슬며시 기법을 묻기도 했습니다.
잠시 미술 작품 감상을 배울 때입니다. 큐레이터가 말했습니다.
‘작품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보면 된다.’
이 전까지만 해도 나는 갤러리에 들어가는 것을 꺼렸습니다. 왠지 고상한 사람들만 들어가야 하는 일로 착각했습니다. 안목이 있는 사람들의 출입구라 생각했습니다. 길을 지나가다 전시회 입간판을 보는 순간 구경을 하고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루는 용기를 내어 그림 전시장에 입장했습니다. 발걸음을 조심하며 작품 앞에 섰습니다. 입구에서 안내하는 사람의 눈치 반, 그림 반을 살폈습니다. 그가 다가와 그림에 대해 말을 걸면 어쩌냐고 하는 생각에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그림에 대한 지식이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몇 차례 이곳저곳 드나들자 점차 그림에 눈을 집중하는 시간이 늘었습니다. 틈틈이 그림책의 해설서를 보았습니다. 보는 만큼 생각도 늘어나는 것인가 어느 그림 앞에서는 머무는 시간과 생각의 시간도 늘었습니다. 작품을 앞에 두고 거리를 달리하기도 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기도 하고 뒤로 물러나 멀리서 보기도 했습니다. 거리에 따라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렸습니다. 여러 사람의 틈에 끼어 남을 의식하지 않은 순간들이 많아졌습니다.
한 번은 전시회장에 들어갔는데 공교롭게도 관람자는 나 한 사람뿐입니다. 비구상 작품입니다. 그림을 보면서 이게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출입구에서 안내하는 사람이 옆으로 다가왔습니다.
‘나에게 말을 걸면 안 되는데.’
무엇인가 이야기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나는 슬며시 옆 작품으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옆으로 다가오자 그만큼 옆자리로 옮겼습니다. 오늘은 평상시보다 머무는 시간이 짧았습니다. 무엇을 감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상이 아니라 그저 스쳐 지나가는 구경입니다. 뒤늦은 후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냥 묻는 말에 뒤섞여 볼 걸 그랬나 봅니다.
큐레이터의 강의를 들은 후 용기를 얻었습니다. 갤러리에 들렸을 때, 궁금증이 있으면 하나 이상은 꼭 물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보이는 대로 감상하면 된다.’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다는 그의 말이 생각납니다.
한 번은 개인 전시회에 들렸는데 그 작가의 일생이 나열된 작품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서전(自敍傳)이 있는 것처럼 자화전(自畵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화가는 많은 사람 틈을 지나 옆으로 다가왔습니다. 내 연배 정도의 여자입니다. 다소 긴 시간을 함께했습니다. 이북에서 태어나 육이오 때 월남했고, 종교 생활을 하는 가운데 외국에 유학을 다녀와 작가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각각의 그림에 그의 설명이 없었으면 상상으로 끝났을 감상입니다. 작품마다 그의 지나온 장소와 사연이 깃들여 있습니다. 화폭에는 새로운 환경의 세계가 있고 때로는 내 삶이 들어있는 것과 같은 동감의 순간도 있습니다. 처음 그림부터 끝의 그림까지 함께한 것에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그도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같은 세대이기에 느끼는 감정일 수 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무식을 무식으로 남겨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에는 창피하다는 생각에 묻고 싶은 것을 숨기곤 했는데 이제는 마음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모르면, 의문이 생기면 물어야 해.’
무식을 오래 남기기보다는 잠깐 창피한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또 다른 갤러리를 나오는 순간 고맙다는 인사를 했는데 엉뚱한 일이 생겼습니다.
“방명록 성함을 써주시고 설문지를 작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글씨를 잘 못 쓰는데…….”
방명록 종이 위에 붓펜이 보였습니다. 내가 서예를 한 일은 있지만 붓펜 글씨는 서투릅니다. 젊은 여인이 다시 한번 요청하며 볼펜을 내어주기에 못 이기는 척 설문지를 작성했습니다.
“글씨를 잘 쓰시면서 뒤로 빼기는…….”
“천천히 또박또박 써서 그렇게 보기겠지요.”
순간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붓펜으로 먼저 서명을 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왼손으로 쓸 걸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