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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어느 날

82. 철새 도래지 20221020

by 지금은

내가 살던 곳이 철새 도래지랍니다. 인근의 전철역에는 몇 년 전부터 ‘철새 도래지’ 홍보 문구가 벽면에 붙고서야 알았습니다. 글자가 내 눈을 스쳐 갔을 뿐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딱히 할 일이 없다 보니 책이라도 읽을까 했는데 휴대전화로 문자가 왔습니다. 평생학습관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답니다. 공황장애를 겪는 미술가의 작품입니다. 호기심이 듭니다. 관심만큼이나 작품은 특이했습니다. 여태껏 보지 못한 구성입니다. 말 그대로 자신의 마음속 장애를 겉으로 표현했습니다. 한 작가의 작품입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들이 인형처럼 날개를 달았습니다. 다리도 있습니다. 허공에 매달린 물체들은 바람이라도 불면 곧 날아오르거나 높이 뛰어오를 것만 같습니다. 무릎을 구부리고 도약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작가의 작품은 온갖 알약들이 화면을 차지했습니다. 그 많은 약을 어디에서 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속의 육체를 따라 약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온전한 채로, 깨진 채로 어느 것은 뭉그러진 채로 몸과 정신세계를 여행합니다. 역시 허공을 날고 있습니다. 작품을 음미해 볼 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장애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자신은 물론 주변의 장애물들을 걷어치우고 탈출을 꾀하고 싶어 함이 분명합니다.


학습관을 벗어나자, 길 건너 철새도래지가 보입니다. 코앞에 바로 내가 살던 집도 보입니다. 이사를 한 후 종종 주변을 지나갔지만, 발걸음이 머문 일은 없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있으니 둘러보아야겠습니다. 내가 심심할 때면 누비고 다니던 강가로 내려섰습니다.


‘맞아 이 둔덕에서 네 잎 클로버를 많이 찾아냈지.’


내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할 때쯤에는 하천이 정비되어 맑은 물이 흘렀습니다. 전에는 공장폐수와 가정생활용수로 오염되어 접근하는 사람들이 드물었습니다. 보기도 흉하거니와 냄새가 났습니다. 민원이 수없이 제기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옆에는 하수종말처리장이 자리하고 있어 날이 궂은날에는 이웃 아파트 주민들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둔덕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심어지고 오솔길이 조성되었습니다. 하천가를 따라 숲이 우거지고 자전거 길이 생겼습니다. 오·폐수가 정화되면서 물고기와 새들도 드문드문 보였습니다.


‘환경이 좋아지니 이사를 하게 되는군.’


내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을 때는 주위에 우리 아파트뿐이었습니다. 하천은 넓은 늪지대에 이르고 갯벌과 연결됩니다. 저어새를 관찰할 수 있는 곳입니다. 부리가 마치 주걱을 닮았습니다. 안내판을 보니 삼월에서 팔월 사이의 이곳에서 머무는 철새입니다. 일급 보호새입니다. 새를 집중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장소는 앞과 뒤로 무성한 나무들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새들이 사람이 접근을 눈치채지 못하게 할 목적입니다. 넓은 가림막에는 겨우 얼굴만을 드러낼 정도의 사각형 구멍이 몇 개 뚫려있습니다. 이곳을 통해 새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액자의 사진이라도 된 양 얼굴을 사각형의 공간에 대고 갈대와 잡초들이 무성히 자라고 있는 늪지대를 들여다보았습니다. 많은 철새가 장난감 오리 배처럼 떠 있습니다. 자맥질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철새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는 망원경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전 다리를 건널 때 물 위쪽에서 청둥오리 몇 마리가 놀고 있었는데 그들과 같은 무리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아니면 기러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입니다. 텔레비전에 배우 최수종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인천 송도를 비롯한 남동공단 주변의 새들에 관한 탐사보도입니다. 전문가와 함께 긴 시간 동안 새들의 활동을 관찰하는 과정입니다. 송도의 갯벌이 육지로 변하면서 주변의 환경이 변화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새가 보금자리를 잃었습니다. 텃새들은 위험에 빠지고 철새들은 그 수가 줄었습니다. 인간의 접근은 새뿐만 아니라 동식물들의 삶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각종 새를 관찰하며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그중 몇 종류만 기억할 뿐입니다. 내가 어려서 좋아하던 보리밭 종달새, 저어새, 기러기, 청둥오리…….


내가 사는 곳은 송도입니다. 갯벌을 메워서 조성된 도시입니다. 이곳에 머물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개발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내 삶의 환경이 여느 곳 못지않게 쾌적하기는 해도 바다생물이 살아가기에 좋은 갯벌을 빼앗았다는 생각에 아직도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삼십 년 전 동막으로 이사하면서 주변의 환경과 정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소래로부터 월미도에 이르는 해변을 자전거와 도보로 헤집고 다녔습니다. 다시 말하면 쏘다녔다고 하면 좋을 듯싶습니다. 갯벌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늘 보았습니다. 바다 생물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철에 따라 갯벌을 누비는 다양한 새들을 눈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최수종과 새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습지와 갯벌의 난개발을 아쉬워하는 것처럼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은 생물들의 보금자리이기도 하지만 우리들의 안식처이기도 합니다. 거대한 산림 못지않게 허파의 역할을 했습니다. 각종 오염원을 희석해 주었습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주변의 하천이 정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직도 더 깨끗한 물이 흘러야 합니다. 하천과 하수종말처리장의 악취도 더 개선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의 파괴를 멈추어야 합니다.

앞서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탈출을 꾀하려고 노력하듯 새들도 같은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인류와 생물이 함께 공존할 방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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