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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어느 날

81. 첫사랑 20221020

by 지금은

‘첫사랑’

갑자기 묻는 말에 잠시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나에게는 사춘기는 있었지만, 첫사랑이란 없습니다. 그 시절 또래의 여자아이들을 볼 때면 사귀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적극적이지 못했습니다. 마음으로만 옆을 스쳐 지나갔을 뿐입니다.

강의 시간에 강사가 사랑에 관련된 영화 몇 편을 일부분씩 맛 보여주었습니다. ‘사랑과 영혼’, ‘러브스토리’ ‘무기여 잘 있거라’ ‘로마의 휴일’……. 오래된 영화들입니다. 낯익은 장면임에도 흐트러짐 없이 시간 내내 스크린에 집중했습니다. 내가 주인공이라도 된 느낌입니다.

이를 어찌합니까, 다음 시간이 되자 앞사람부터 자신의 첫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고 합니다. 없다고 말하고 지나치기에는 수업 분위기상 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앉은 순서로 보아 나는 세 번째입니다. 없다고 말하려다가 그래도 그게 아니지 하고 잠시 추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첫사랑은 아니어도 그럴듯하게 장면을 소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에서 본 영화의 특별한 장면들에 견주어야겠습니다.

‘바로 그거야, 목화밭.’

한 시간 내내 바라본 사랑의 영화는 순간순간의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지금은 감정이 조금 흐려지기는 했어도 내가 마치 등장인물이었던 것처럼 설렘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내가 교사로 첫 직장에서 아이들과 생활할 때입니다. 시골의 규모가 작은 학교지만 내 인기가 높았습니다. 아이들이 내게 다가오는 것보다 동네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입니다. 이미자의 노래 ‘섬마을 총각 선생님’이 섬 처녀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면 나는 농촌 처녀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음이 분명합니다. 발령받고 며칠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청혼하는 처녀의 부모가 나타났습니다.

한 번은 생각지 않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한 학부모와 친하게 지내는 선생님이 그 집에 볼일이 있다며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쉬는 날이라 별생각 없이 찾아갔습니다.

“별로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두레상에 차려진 음식은 다양했습니다. 한 마디로 잔칫상이나 다름없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밑도 끝도 없이 나에게 자기 딸이 어떠냐며 청혼을 한 것입니다.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딸은 육 학년입니다. 어쩌다 보니 늦은 나이에 입학시켰다며 열일곱 살이라고 합니다. 내 바로 옆에 있는 선생님의 반 아이입니다. 그러고 보니 바로 이분이 중매쟁이입니다. 당황한 표정을 짓자, 담임선생은 학교에 돌아가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이때 첫사랑은 아니지만 이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직장 동료입니다. 나보다 몇 개월 늦게 부임한 새내기 교사입니다. 직원이 몇 명 되지 않아 자연스레 가까워졌습니다. 집과 직장의 거리가 멀기도 하지만 교통편이 좋지 않아 학교 근처에서 하숙하거나 자취했습니다. 늘 학교에서 붙어 지냈어도 저녁을 먹은 후에는 갈 곳이 마땅치 않으니 우리는 자연스레 운동장가의 주인 없는 철봉에 기대서거나 시소에 앉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녀는 나와 비교해 성격이 활달했습니다. 내 발걸음이 보이지 않을 때는 종종 나를 불러냈습니다. 그녀는 특히 둥근달이 뜨는 밤을 좋아했습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처녀입니다. 나의 기억은 가을에 살고 있습니다. 철봉에 기대어 소곤소곤, 시소에 앉아 얼굴을 마주하며 오르락내리락 주고받는 이야기에 가을밤이 깊어져 갑니다. 나는 주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녀는 지금 책을 두 번째 읽고 있는 셈입니다.

“00책 읽어봤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책은?”

또 고개를 젓습니다.

“책 좀 읽지!”

그녀의 문학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달의 움직임을 따라 밤이 깊어져 갑니다. 어느새 머리가 어깨가 옷소매가 축축한 느낌이 듭니다. 이슬이 내리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내가 그만 각자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아직도 미련이 있나 봅니다.

“무드가 이렇게 없어서야…….”

그녀가 이끄는 대로 발길을 옮깁니다. 학교 울타리 넘어서 목화밭입니다. 주위가 온통 대낮입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그 장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달을 향해 목화밭을 향해 감탄사를 뿜어냅니다. 휘파람을 ‘휘익’ 불었습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나는 순간 그녀의 입을 막으며 연한 목화 다래를 따서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시골에서 젊은 시절을 살았다던 내 또래의 수강생이 내 이야기에 동조했습니다.

“맞아요, 메밀꽃보다 더 밝지요.”

“그 멋진 풍경을 어디 가면 볼 수 있을까요?”

젊은 여인이 목화를 본 일이 없다며 물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요즈음은 그 넓은 목화밭을 볼 수가 없습니다. 대신 내가 목화 몇 포기를 볼 수 있는 곳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만 들어갑시다. 감기라도 걸리겠어요.”

그녀는 이슬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입니다. 맑고 고운 노래가 이어집니다. 새벽이 오려나 봅니다. 노래를 듣는 이 깊은 밤, 창밖으로 쓸쓸한 가을이 물듭니다. 나는 지금도 팝송을 좋아합니다.

‘철새는 날아가고, 러브스토리, 사랑과 영혼, 영화의 삽입곡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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