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어느 날

90. 그림책 20201025

by 지금은

오늘은 그림책 만들기를 끝내는 날입니다. 보통날과는 달리 정장을 찾아 입었습니다. 아무래도 끝나는 날이니 우리만의 조촐한 행사가 있지 않을까. 그도 아니라면 사진이라도 한 장 찍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지난주에 담당자가 지나가는 말로 귀띔을 했습니다.


“회관에서 행사하지 않으면 우리끼리라도 자축해야 하지 않을까요.”


수강생끼리 조촐한 기념을 했습니다. 손수 만든 그림책을 들고 사진을 찍고 수료증도 받았습니다. 책장을 넘기며 그림에 얽힌 사연을 동료들에게 발표했습니다. 각자마다 숨어있는 일들이 입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나만 빼고는 모두가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남겼습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자서전’입니다. 내용은 달라도 살아온 시기가 비슷하다 보니 각자 발표하는 동안 모두 고개를 끄덕입니다. 동질감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한 분은 수료증을 두 개나 받았습니다. 이유는 자신의 과거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기 어머니의 삶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모친이 올해 구십구 세랍니다. 한동안 모친이 치매를 앓아 온 집안 식구들이 고통을 겪었는데 본인은 물론 가족들 모두가 이겨냈다고 합니다. 치매가 무엇인지 몰랐을 때는 불화의 연속이었는데 병원에 가서 원인을 알고부터는 모친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꾸준한 치료와 가족의 사랑이 어머니를 치매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완치된 것은 아니지만 경증의 상태로 별 탈 없이 가정에서의 생활을 잘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삶을 기록하고 싶어서 슬며시 운을 뗐더니만 찬성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분은 우리와는 좀 더 차이 나는 세대를 사시고 있는 분입니다. 이야기 속에는 또 다른 삶이 보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젊은 시절의 이야기가 있고 부잣집으로 시집을 갔지만 생각 외로 혹독한 시집살이도 있습니다. 시아버지의 재취로 들어온 시어머니가 두 살 아래임에도 불구하고 어른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평소에도 심하게 대했던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의 연세와 같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도 어머니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면 좋을 걸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평생을 고생하다 돌아가셨습니다. 시아버지 없는 구 남매의 집에 와서 편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몇몇 삼촌들은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자신의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기댔을까요. 한 마디로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우리 네 남매의 교육을 위해 촌구석에서 탈출하여 홀로 생업을 꾸리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품에 안겨 고등교육을 모두 마쳤습니다.


이제는 했는데 어머니는 우리를 기다리지 못하셨습니다. 각자 기반을 다져갈 즈음 세상을 달리하셨습니다. 세월은 물처럼 흘러가는데 부모는 물처럼 영원히 흐를 수가 없습니다. 내가 어느덧 이승에서의 부모님 연세를 넘겼습니다. 이제야 부모님을 헤아리는 나이가 됐나 봅니다. 어머니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살아계실 때 좀 더 잘할걸.’


때늦은 후회입니다.


담당자는 설문지를 돌렸습니다. 다음을 위한 준비에 우리의 의견이 참고될 거라고 합니다. 좋은 점을 먼저 기록하고 내년을 위해 반영해야 할 점을 차근차근 적었습니다. 작품을 보니 조금씩 부족한 면이 보이기는 하지만 각자의 특별한 재능이 살아있습니다. 작년과 올해 참석해 보니 노인들이라고 해서 강사는 한 단계 낮춰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도서관과 문화원에 그림책 만들기 강좌 참석하여 젊은이들과 활동해 보았습니다. 책을 만들고 보니 그들과 견줄만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완성된 원고를 보고 도서로 등록하라는 권유도 받았습니다. 참여 시간과 책의 지면을 더 늘렸으면 합니다.


지금의 내 그림책에는 종이접기 작품이 활용되었습니다. 은행잎, 단풍잎, 원피스를 입은 소녀……. 남다른 표현의 맛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자축을 끝냈을 때 나는 담당자와 동료들에게 ‘아코디언’이라는 종이접기 물건을 하나씩 선물했습니다.


“노래가 생각날 때 한 곡 하시면서 반주하시지요.”


작동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감탄을 자아냅니다. 문을 나설 때까지 인사를 받았습니다. 내년에는 틀림없이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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