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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어느 날

89. 가을은 가을다워야 20201025

by 지금은

가로수 길과 공원의 나무들이 아름다워 온종일 쏘다녔습니다. 단풍이 참 곱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저 좋은 색깔을 온몸에 입히고 싶습니다. 내 머리에는 하늘의 색을 물들이고 가을을 만끽하는 날입니다. 집으로 돌아와 만보기를 켜보니 삼만 보 이상 걸었습니다. 평소에 서너 배는 됨 직합니다.


25일 북쪽에서 찬 공기가 밀려오면서 대부분 지역 아침 기온이 5도 내외에 머물며 쌀쌀하게 시작했습니다. 경기 동부·강원 영서·충청내륙·전라 동부는 아침 기온이 영하권에 들면서 얼음이 얼기도 했습니다. 이날 아침 기온은 전국적으로 1~10도로 평년보다 낮았습니다.


“고도 5㎞ 상공으로 영하 25도의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남해상까지 내려왔습니다.”


서쪽 지역엔 차가운 북서풍이 불고 동해안엔 찬 북동풍이 불고 있습니다. 이 넓은 곳의 상황을 어떻게 세세히 알겠습니까. 이는 인터넷 덕분입니다.


저녁을 먹고 나자, 졸음이 밀려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 신체의 시계가 빨라진 셈입니다. 이에 따라 깨어나는 시간도 빨랐습니다. 어둠 속에 창밖을 보니 연못가의 안전 도모 등이 오색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누가 가을이 아니랄까 봐 머리 위의 단풍들과 밤새 교감을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스르르 빛을 감추었습니다.


‘뭐, 나는 연못에 빠져도 되는 거야.’


엊그제 초등학생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두 아이가 연못가에서 페트병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두 녀석이 물을 들여다보며 주위를 강중강중 뛰는 모양이 불안해 보였습니다. 벤치에 앉아 그들을 눈여겨보았습니다. 바늘만큼이나 작은 물고기를 잡으려고 물을 헤집고 연못의 징검다리를 뛰어넘기도 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잡아 집에서 보호해야 한답니다. 내가 의심의 눈길을 보내자, 봄이 되면 틀림없이 이곳에 풀어줄 거라고 약속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다 물에 빠지면 어쩌려고.”


“괜찮아요. 그동안 한 번도 빠진 일이 없었는데요 뭐.”


나에게 대꾸를 하자마자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습니다. 연못의 가장자리 턱에 발이 닿는 순간 미끄러지며 ‘퐁당’ 했습니다. 미끄러져도 고렇게 미끄러질까. 슬라이딩하는 것처럼 발부터 엉덩이, 등, 머리가 차례로 쏙 들어갔습니다. 친구가 잡아주려고 손을 내밀었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아이가 놀랐을 줄로 알았는데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어섰습니다. 마치 오뚜기를 흉내라도 내려는 모양새입니다. 친구가 손을 내밀었지만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는지 내 가까이 있는 땅을 밟고 성큼 올라왔습니다. 물이 주르르 바닥을 적십니다. 온몸을 부르르 털었습니다. 강아지가 목욕을 끝내면 온몸을 털어 물기를 날리는 모습입니다.


친구가 걱정되어 물었습니다.


“괜찮니?”


“작년에도 빠져봤는데 뭘.”


그의 빨간 점퍼가 더 빨개졌습니다. 그의 갈색 바지가 더 짙어졌습니다. 파란 셔츠가 더 진해졌습니다. 아무래도 염려가 되는 모양입니다. 휴대전화를 켰습니다. 친구 집에 알림입니다.


“구상이가 연못에 빠져 온몸이 젖었어요.”


상대방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물에 빠진 친구는 대수롭지 않은 듯 다시 연못을 들여다봅니다. 그가 빠진 자리에는 아직도 잔물결이 입니다. 물속에 잠긴 나무들이 단풍잎을 매단 채 일렁입니다. 하늘이 움직이고 나무들이 구름이 함께 잔잔하게 떨고 있습니다. 아이가 떨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연못이 놀랐나 봅니다.


“뭐야, 엄마가 빨리 오라는데.”


연못에 정신이 팔려 아랑곳하지 않는 친구의 팔을 끌고 집으로 향합니다. 연못에서 곧 나왔을 때와는 달리 추위를 느끼는 모양입니다. 입술이 하늘만큼 파랗습니다. 떨림이 나뭇잎만큼이나 떨립니다.


나는 옷을 두껍게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를 따라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옆 사람이 하품하면 나도 따라서 하품한다더니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단풍도 마찬가지입니다. 잎이 물드니 옆의 잎이 따라서 물이 듭니다. 앞에 나무가 물드니 뒤에 나무가 따라서 물듭니다.


햇살이 연못을 깨웠습니다. 화살보다 긴 노란 줄기들이 연못에 꽂힙니다. 갑자기 눈이 부십니다. 텅 빈 연못은 잠자리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고추잠자리 두 마리가 각자의 몸을 안은 채 배회합니다. 산란을 위한 준비라고 생각됩니다. 그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그림자도 같은 모양을 한 채 잠자리를 따릅니다. 연못에는 나뭇잎들이 붉게 노랗게 떨어져 옹기종기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무에도 알록달록, 연못에도 알록달록 무르익어 가는 가을을 알립니다.


가을 속에 나를 남겨야 합니다. 내가 자리 잡을 배경을 살핍니다.


‘찰칵’


하늘과 나무가 연못이 나를 가두었습니다. 나는 연못과 나무와 하늘과 하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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