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눈사람
새벽 일찍 잠에서 깨었습니다. 아무래도 약속을 잘못했나 봅니다. 호야는 자신의 키보다 아주 큰 눈사람을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큰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걱정입니다. 창호지 문틈으로 밖을 내다봅니다. 앞산이 보이지 않습니다. 신을 벗어 놓은 뜰도 없어졌습니다. 며칠 전부터 내리던 눈은 그칠 줄을 모릅니다. 눈이 그만 왔으면 좋겠습니다.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같은 마음입니다.
오늘 생각은 좀 다릅니다. 어제 아침과는 달리 눈이 며칠만 더 왔으면 좋겠습니다. 점심때 명자와 한 약속이 자꾸만 마음에 걸립니다. 오늘 눈이 그치면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 큰 눈사람 만들기 시합할까?”
“그래, 좋지. 나는 우리 강아지만 한 눈사람.”
“나는 내 키보다 아주 큰 눈사람.”
어쩌다 보니 자꾸만 커져서 명자는 제 키보다 한 뼘 큰 눈사람을, 호야는 제 키보다 열 배나 큰 눈사람을 만들기로 약속했습니다. 눈이 계속 내립니다. 아침을 먹고 밖을 내다보니 쓸어내린 뜰 위에 밤새 쌓인 눈만큼 또 쌓였습니다. 계속 눈이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점심때가 지나자, 명자가 찾아왔습니다.
“눈사람 만들자.”
“무슨 눈사람?”
가슴이 뜨끔합니다.
“어제 한 약속 잊었니?”
명자와 호야는 사립문을 지나 텃밭으로 갔습니다. 눈이 허벅지까지 빠집니다. 햇살이 따스하게 주위에 맴돕니다. 명자는 신이 났습니다. 눈을 한주먹 뭉쳐 나에게 던졌습니다.
“눈이 잘 뭉쳐진다.”
명자가 눈을 밟기 시작합니다. 꽃 모양을 만들 때처럼 한발 한발 몸을 회전시킵니다. 조금씩 주위를 맴돌면서 눈을 다집니다. 꽃 모양 대신 눈웅덩이가 생겼습니다. 눈사람을 놓을 자리라 짐작됩니다. 눈을 뭉쳐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눈덩이가 점점 커집니다.
“야 호야, 뭐 하는 거야? 눈 뭉쳐야지.”
호야는 우두커니 명자가 하는 짓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키의 열 배나 되는 큰 눈사람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그래 뭉쳐야지.”
명자가 굴리던 눈 뭉치는 어느새 커져서 제힘으로는 굴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호야가 슬그머니 다가갔습니다. 눈 굴리는 것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몸통이 만들어졌습니다. 얼굴도 만들었습니다. 얼굴은 아저씨가 몸통에 올려주었습니다.
“야, 네 눈사람은 안 만들어?”
“응”
“약속 잊었니? 네 키보다 열 배나 더 큰 눈사람 만들기로 해놓고서는”
명자가 은근히 재촉하기 시작합니다. 큰일 났습니다. 명자는 끈질깁니다. 한번 말하기 시작하며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야, 눈사람 만들어야지. 열 배나 큰 눈사람.”
“알았어, 만들면 되지.”
“나는 약속을 지키려고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내 머리카락이 다 젖었네.”
맞습니다. 머리카락이 다 젖었습니다. 명자 얼굴에 땀이 흐르고 입에서 더운 입김도 나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끝을 보고 있습니다. 화가 난 명자가 호야를 확 밀었습니다. 호야는 그만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졌습니다. 눈을 감았습니다. 등이 솜이불에 닿은 것처럼 폭신합니다. 따스한 햇살이 눈썹에 매달립니다. 휘리릭 바람이 얼굴을 스쳐 갑니다.
‘후드득’
밭두둑에 서 있는 소나무 가지에서 눈 쏟아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일어나, 빨리 일어나.”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 호야에게 명자가 소리쳤습니다. 잠시 후 호야의 양 어깨를 눌렀습니다. 몸이 눈 속에 묻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눈이 얼굴 위로 날리며 입과 콧구멍 속을 파고듭니다.
‘푸푸’
명자의 손에 이끌려 일어났습니다. 눈을 털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내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선명합니다. 눈 사진이 제대로 찍혔습니다.
‘바로 이거야, 내 몸의 열 배.’
부삽을 들고 나온 호야는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명자의 눈사람을 기준 삼아 열 배 크기의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나를 따르라.”
부삽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호야의 발이 따라갑니다. 명자의 발이 따라갑니다. 한 바퀴 돌았습니다. 또 한 바퀴 돌았습니다. 원이 한 개 되었습니다. 원이 두 개 되었습니다.
호야가 원을 따라 종종걸음을 합니다. 명자가 호야 뒤를 따라 종종걸음을 합니다. 두 개의 원이 점점 부풀어 오릅니다.
“눈사람 만세.”
두 팔을 치켜들고 뒤 돌아 명자를 보았습니다.
‘누운 눈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