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벌초 20220916
친구가 전화를 했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집에 꼭 갇혀있어 답답하다고 했습니다.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목소리가 좋지 않았습니다. 죽을 맛이라기에 살맛은 없는 거냐고 했습니다. 친구는 다섯 가지 맛에 죽을 맛을 더하면 여섯 가지 맛을 알고 있는 셈입니다. 살맛도 찾으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미치겠다며 전화를 했습니다. 미치지 말고 솔이나 도를 치라고 했습니다. 술을 넉넉히 먹은 눈치입니다. 가뜩이나 기분이 언짢은데 옆 승객이 전화소리가 시끄럽다고 핀잔을 준다고 합니다.
“죽여 버려야겠지. 나 성질나면 무서운데.”
죽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전화가 끊겼습니다.
잠시 후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큰 일 났네.”
“그래, 죽인 거야.”
친구가 성질을 부려 어쩌면 좋으냐고 합니다. 성을 갈라고 했습니다. 추석이 가까워지자 고향 친구에게 자기 부모님의 산소에 벌초를 부탁했답니다. 추석 때 가보니 벌초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벌초한 거야.”
“그럼 잘했지. 인마 네가 부탁한 건데.”
알아보니 그 친구는 착오로 남의 묘지를 벌초하고 말았습니다. 미안해하는 친구에게 잘했다며 인사치레하겠다고 말했답니다. 거절하는데 몇 차례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인사치레하겠다고 하자 틈만 나면 있는 성질 없는 성질을 다 부려서 어쩌면 좋겠느냐고 합니다. 이유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오지랖이 넓어서 그렇지.”
전화를 한 친구는 추석 한 달 전에 자기 부모님의 산소를 벌초했답니다. 그 후 비가 자주 와서 풀이 무성한 줄로 알고 친구에게 부탁했습니다. 이를 모르는 그는 서로 이웃하고 있는 두 묘지 중 정돈되지 않은 묘지를 건드렸습니다.
성질을 부릴 게 아니라 묘지석을 확인했어야 한 거 아니냐고 말을 합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고향 친구가 정작 화낸 이유는 그게 아니라니까. 죽인다고 덤비니 어찌하나 하기에 살려면 덤비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