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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은 Dec 15. 2024

☏2021

3. 네 잎 클로버 20210828

태풍의 끝입니다. 맑은 날을 기대했는데 아직도 비는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빗방울을 흩날립니다. 오전 내내 움직임이 없던 나는 갑갑한 마음에 의자를 책상 밑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밖은 우산을 펴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움직임이 뒤섞였습니다. 신호등 앞에서 정지한 사람들의 모습도 매한가지입니다. 잠시 망설였습니다. 작은 우산을 들었습니다.


“날이 궂은데 어디 가요?”


“심심해서 네 잎 클로버라도 찾아볼까.”


소나기가 아니라면 비가 와도 좋고 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바짓가랑이가 젖지 않았으면 합니다.


밖으로 나왔습니다. 우산을 쓰기도 안 쓰기도 애매합니다. 몇 방울씩 떨어지는 빗줄기는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일부러 우산을 가지고 나왔는데 안 쓰기는 그렇고 또 쓰기에도 거추장스럽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우산을 펴다 접기를 반복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오솔길은 한적합니다. 길이 좁아 상대와 마주칠 때는 길섶으로 비켜나곤 했는데 오늘만큼은 여유롭습니다. 말 그대로 길옆의 클로버에 눈이 갔습니다. 빗방울을 머리에 인 이파리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봅니다. 세 잎 클로버입니다.


‘너희들이 아니라 네 잎야.’


발걸음이 더딥니다.


오솔길을 벗어나자 걸음을 빨리했습니다. 운동을 하자고 나왔는데 잠시 클로버에 정신을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광장을 지나고 긴 호수를 지났습니다. 그 길을 벗어나 다른 길로 들어서자 다시 클로버가 눈에 보입니다. 빨리 걷겠다는 마음이 어디론가 숨어버렸습니다. 발걸음이 느려집니다. 갈대가 우거진 길의 가장자리는 어느새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바지 깃에 스치는 풀들을 인정사정없이 잘라냈습니다. 길이 탁 트여서 좋게는 한데 얼굴을 내민 풀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 클로버도 뭉텅뭉텅 잘리고 바닥에 납작 엎드린 것들만 빗방울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몇 잎씩 발견되던 네 잎 클로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 잎 클로버와 함께 잘려나간 것이 분명합니다. 직선 길이 끝날 때까지 가는 동안 네 잎 클로버를 하나 찾아냈습니다. 이 날씨에 이거 하나면 만족입니다.


휴대전화에서 문자를 알리는 신호입니다. 학습관입니다. 왠지 좋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구월부터 시작되는 평생학습 프로그램을 신청했는데 결과를 알려왔습니다. ‘에세이, 영어 회화, 올드팝송’ 당첨을 축하합니다.

클로버의 줄기를 손에 든 채 집으로 향하는데 휴대전화의 벨이 울렸습니다.


“당첨 축하해요, 아트북 만들기는 신청한 사람이 몇 안 돼서 부득이 폐강하게 되었습니다. 양해해 주시고, 더 필요로 하는 강좌가 있으면 말씀해 주셔요.”


“고맙습니다. 세 강좌로도 만족합니다.”


손에 들고 있던 클로버를 내려다보았습니다. 하늘을 향해 모습을 드러냈던 클로버가 바닥을 향했습니다. 어느새 줄기와 잎이 힘을 잃었습니다. 저번에도 그랬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뿌리를 떠난 줄기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무심했습니다. 시들면 시드는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물이라도 적셔볼 걸, 아니 빗방울이라도 맞혀볼걸. 아니 따지 말아야 했습니다.


‘네 잎 클로버는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있을까. 클로버의 마음이라면 지금의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만 할까. 이기적인 마음은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칩니다. 휴대전화 지갑 속에 접혀있는 종이를 꺼냈습니다. 시든 클로버를 잘 펴서 반으로 접은 종이 사이에 끼웠습니다. 홀로 시들어 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행운을 찾는다고 했지만, 행운은 아닙니다. 자신과 맞지 않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힘을 다해 변화를 시도했는데, 시련을 겪게 됐습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무리 속에 다른 모습이나 행동을 보일 때는 종종 눈총을 받곤 합니다.


올해는 네 잎 클로버가 눈에 잘 뜨였습니다. 우연히 찾은 경우도 있고 시간을 들여 찾아낸 것도 있습니다. 책갈피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언제 행운을 가져다줄지는 모릅니다. 행운을 바라는 사람들의 희망일 뿐입니다. 책갈피를 들쳤습니다. 그 싱싱함은 모두 어디로 갔나, 시간이 지날수록 초록색은 누런 갈색으로 변합니다.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


노래 가사처럼 편지를 써야 할까. 손 편지를 써본 지가 언제인지 생각이 가물가물합니다. 나뿐인가 많은 사람이 편지를 멀리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정이 깃든 손 편지라는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붑니다. 클로버가 잠자는 책갈피를 펼칩니다. 펜팔의 추억을 살려 편지 속에 네 잎 클로버를 동봉할까 합니다. 어느새 가을이 무르익는 가운데 단풍이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가을 편지에 어울리는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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