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소나기 0230113
벤치에 누웠습니다. 민망하다는 생각에 수건으로 중요 부위를 가렸습니다. 해가 쨍하고 눈 맞춤을 합니다. 손을 들어 해를 가리다 눈을 감았습니다. 계곡의 세찬 물소리가 귓전을 울립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잠깐 졸았나 봅니다.
계곡의 사나운 물소리는 사라지고 소나기가 내립니다. 세찬 소나기입니다.
‘파도 소리가 들려야지 웬 소나기람.’
해변에도 소나기가 내리나 봅니다.. 비를 피해야겠습니다. 퍼뜩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소나기도 바닷가도 사라지고 물소리만 요란합니다. 천정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보입니다. 누군가가 물벼락을 맞고 있습니다. 물에 빠진 강아지가 몸을 털어내듯이 한발 물러서서 부르르 온몸을 떨었습니다. 물이 차가운 듯이 보입니다.
나도 그 사람을 따라 부르르 떨었습니다. 몸을 일으켰습니다. 마음을 데워야겠습니다. 탕을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각진 턱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발을 헛디뎌 부딪치기라도 하면 아픔이란 오로지 내 몫입니다. 한 번에 넘으려다 엎드려 턱에 손을 짚었습니다. 돌다리도 두드려 건너라는 속담처럼 조심해야 합니다. 엉거주춤 한 발을 물에 담갔습니다. 다음 발이 따라갑니다. 짚었던 손은 어느새 할 일을 마쳤습니다.
탕에 전신을 담그는 순간 건너편 사람의 눈과 마주쳤습니다. 그만 나가도 될 터인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벤치에 누울 때부터 그는 탕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천정을 한 번 보고 주변을 두 번 둘러봅니다. 벽시계가 눈에 뜨입니다. 4시 20분입니다. 또다시 눈을 마주치기가 싫어 눈을 감았습니다.
‘그때 소나기가 내렸었지.’
비를 피하자고 소에게 말했습니다. 고삐를 내둘렀습니다. 소는 풀을 뜯느라 내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옆구리를 스치는 고삐의 촉감도 느끼지 못했나 봅니다. 두어 번 휘둘렀지만,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만두었습니다. 사나운 비는 나를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옆에 큰 바위라도 있었더라면 밑에 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몸이 굽은 큰 나무라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나기는 곧 고개를 넘었습니다. 급한 볼일이라도 있어 보입니다. 이런 비를 지나가는 비라고 합니다. 여우비라고 하지요. 안개가 밀려오는 줄 알았습니다. 갑자기 연무가 산등성이를 넘어 골짜기를 메웠는데 소나기가 뒤를 따라왔습니다. 연무가 사라지고 소나기가 사라지고 햇볕이 쨍 골짜기를 품었습니다. 풀잎에 맺힌 빗방울들이 반딧불처럼 반짝입니다. 조용하던 개울물이 어느새 조잘거립니다.
윗도리를 벗어 물기를 짜냈습니다. 아랫도리도 벗었습니다. 소가 힐끔 나를 쳐다봅니다. 한 발짝 앞으로 몸을 옮기고 고개를 흔듭니다.
‘뭘, 벗은 것은 마찬가지구먼.’
눈을 떴습니다. 벌거벗은 사람이 탕 속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거울을 보듯 하더니만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습니다. 물소리가 요란합니다. 개울 물소리가 아닙니다. 아직도 소나기입니다. 천정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폭포의 물소리가 아니라 세차게 퍼붓는 소나기의 모습입니다. 갑자기 귓속이 시끄러워집니다.
천천히 탕을 나왔습니다.
‘이 겨울에 소나기라니.’
내일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는 예보입니다. 많은 곳은 100밀리나 내린다고 합니다. 갑자기 곤두박질한 매섭던 추위가 주춤하더니만 줄행랑을 쳤습니다. 사람들의 원성을 들었나 봅니다. 어디에 숨어있음이 분명합니다.
벌써 징조가 보입니다. 하늘이 갑자기 흐려졌습니다. 예보를 미리 확인시키려나 봅니다.
‘가을비 우산 속을, 아니 겨울비 우산 속을.’
아직은 젊음입니다. 덕수궁 돌담길이 떠오릅니다.
‘맞아, 이 겨울이었어.’
아내와 함께 처음 거닐었던 곳입니다. 뒤를 돌아보자, 선명한 발자국이 뒤를 따랐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엉거주춤 손을 머리에 얹었습니다. 집으로 향합니다. 뒤를 돌아봅니다. 보이지 않는 발자국이 뒤를 따릅니다. 신호등을 기다리는 내 옆에 아내는 어느새 서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처럼 그렇게 하늘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건넜습니다. 소나기가 눈치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