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죽음에 관하여 20210926
나는 죽음에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젊었을 때 동생과 어머니는 내 곁에서 떠났습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어느 가을날 동생을 잃었고, 또 다른 어느 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어머니와 이별해야만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헤어짐은 나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한동안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방황하며 하느님을 원망했습니다. 뜻하지 않은 죽음이 지금까지도 나의 마음을 괴롭힙니다. 나 홀로 세상에 버려진 느낌입니다.
이 세상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많습니다. 생로병사, 그중에도 죽음의 문제만큼은 그 누구도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게 인간의 숙명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가족을 잃은 후부터 가끔 잠자는 아내의 숨소리를 들어보고, 아들의 방을 기웃거립니다. 인기척이 없을 때는 갑자기 불안해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갑자기 떠나보내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죽음에 관해서는 많은 사람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날이 올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마지막을 잊고 살아갑니다. 죽음을 늘 머릿속에 담고 있다면 온전한 삶을 이어가기가 힘듭니다.
특별한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 중국의 진시황은 죽음을 물리치고자 불로초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늙지도 죽지도 않는 약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수천 명에 이르는 신하와 백성들을 시켜 불로초를 구하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제주도에도 불로초를 구하려고 중국에서 사람들이 왔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약초를 구하지 못했지만, 제주도 한라산에는 불로초가 있을 거라는 전설이 전해지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한국의 산삼은 중국에서 매우 유명해졌습니다.
전해오는 신화에 고대 수메르의 ‘길가메시’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공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는 세상에서 가장 유능하고 힘센 남자입니다. 그가 전투에 나서면 누구에게나 승리했습니다. 어느 날 가장 친한 친구 ‘엔키두’가 죽자,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은 죽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는 죽음을 물리칠 방법을 찾습니다. 우주 끝까지 가보았지만 결국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대신 그가 깨달은 것은 신들이 인간을 창조할 때 죽음을 끌어안도록 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미신과 종교가 있습니다. 미신이든 종교든 죽음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죽음이 없는 종교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이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하며 내세에 희망을 두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죽음을 물리치고 지상에서 영원히 살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종교에서의 영원한 삶이란 저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올바른 삶이 저세상에서의 삶을 영속시켜 줄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할 뿐입니다. 이승에서의 영원한 삶은 그 누구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에 반기를 드는 것은 과학과 의술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도합니다. 죽는 것은 신이 정해놓은 것이 아니라 의술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의학의 발달은 현재에 당면한 인간의 죽음을 뒤로 미루는 역할을 합니다. 심장이 망가졌을 경우 심장박동기를 달거나 새 심장으로 바꿉니다. 암이 발생을 알아낸 후에는 방사선으로 몰아냅니다. 박테리아는 항생제로 물리칩니다. 신체의 일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경우 대체 물질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즉 의학의 무한한 발전이 죽음을 해결하리라 기대합니다.
현재까지 인간의 죽음은 우리가 모든 기술적인 방법을 동원해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극복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질병과 노화의 원인이 되는 생리적, 유전적인 결함을 찾는 연구에 몰두합니다. 더 좋은 신약을 비롯한 치료법과 인공장기를 개발 중입니다. 이 기세라면 언젠가는 죽음의 신을 쫓아버릴지도 모릅니다. 이런 노력으로 인간의 수명이 점점 연장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25세에서 40세이던 평균 수명이 선진국의 경우 80세 이상으로 상향되었습니다. 영아와 유소년의 사망률도 획기적으로 줄었습니다. 과학의 발달에 따른 의술의 발전과 신약 개발의 결과입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상처와 염증을 치료할 수 있는 항생제나 소독약이 개발되었습니다. 마취제의 출현은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데 획기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할머니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저 윗집 경두 어머니는 열두 명을 낳았는데 지금은 남매 두 명뿐이야.”
열여섯 명을 낳았다는 집도 있습니다. 이 집은 세 명의 자식이 살아있을 뿐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보통 열 명 내외의 아기를 탄생시켰지만, 영아의 사망으로 인해 성인으로 성장하기까지는 몇 명에 불과했습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아니 하나 낳아 잘 기르자, 세 명은 많다고 외치던 때와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그만큼 의술과 식생활, 위생이 발전한 결과입니다.
길가메시나 진시황의 염원인 불로장생이 달성되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100년이나 1000년이 걸릴지 모릅니다. 몇몇 유전 공학자들은 내 생각보다 기간을 짧게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2050년이 되면 일부의 사람들이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럴 경우 나의 근심과 걱정은 한층 가벼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사람이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죽음이 없는 세계에서 과연 종교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종교가 사라진다면 이후 인간의 삶은 어떻게 변할지 예측이 어렵습니다.
‘감히 신의 영역을 침범하다니.’
노아의 방주처럼 인간에게 벌을 내려 영원한 삶이 도래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신과 인간의 맞섬이 내내 이어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죽음을 초월하는 삶은 지금까지 어려운 숙제임이 틀림없습니다.
내 걱정이 없어질지 두고 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