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익숙함 20230117
익숙함은 친근감과 연관 짓게 합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다가 우연히 나태주 시인이 쓴 책을 집게 되었습니다. 친숙한 이름이기에 책의 제목과 상관없이 손이 갔습니다. 집에 와서 목차를 훑어보니 자서전입니다. 나보다 나이가 퍽 많다고 여겼는데 생각보다 적은 차이입니다. 그는 해방되던 해에 태어났고 나는 육이오 전 해에 태어났으니, 지금에 와서는 그 차이를 상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내가 나태주 시인과 동년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친근감으로 다가올 뿐입니다.
가깝게 느끼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책장을 몇 쪽 들치는 순간 ‘오빠골’이란 말에 퍼뜩 고향 생각이 났습니다. 어려서 여러 번 듣던 마을 이름입니다. ‘절골’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근에 낯익은 지명이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천안 시내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두메산골입니다. 멀지 않은 곳에 오빠골, 절골, 강당골 같은 지명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나는 한 번도 마주친 일이 없고 삶의 과정에 대해서 서로 알지 못합니다.
책에 펼쳐진 그의 마을 모습이나 세월의 흐름이 나를 둘러싼 환경과 비슷해서 친근감을 더해주었습니다. 나 작가가 우리 마을과 우리 집의 모습을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우리 마을에는 나무들이 많았습니다. 우리 집의 모습을 그의 말처럼 표현해 봅니다. 집 뒤란에 심어진 대나무 숲, 참나무, 밤나무, 탱자나무, 감나무, 이웃집에 참죽나무, 자두나무가 있습니다.
이중 내가 아끼는 것은 탱자나무입니다. 우리 집 울타리에 탱자나무가 있는 이유는 산짐승의 출입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뒤란은 곧 뒷산으로 이어집니다. 깊은 밤이면 늑대의 울음, 여우의 울음, 부엉이나 소쩍새의 울음이 있었습니다. 어둠이 무르익는 밤이면 밖에 나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짐승들의 소리에 머리가 쭈뼛해졌습니다. 가끔 삵이 닭장에 침입해서 닭을 잡아먹기도 하고 물고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이런 날이면 집안 식구들은 물론 이웃집 사람들까지 선잠에서 깨어나 한바탕 소동을 겪어야 했습니다.
“에에 쥐약을 놓거나, 덫이라도 놓아야지 원.”
애써 기른 보람도 없이 한순간에 짐승에게 좋은 일만 시켰습니다. 하지만 말과 같이 쥐약을 놓거나 덫을 설치한 일은 없습니다. 탱자나무의 날카로운 가시들이 철조망처럼 울타리를 둘러쌌지만, 짐승의 꾀는 사람의 생각처럼 우둔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용케도 틈을 비집고 드나들었습니다.
나의 장난감은 바로 탱자입니다. 열매가 익으면 대소쿠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몇 개가 나의 호주머니로 들어갑니다. 냄새가 좋습니다. 가지고 놀다가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습니다. 어른들은 약용으로 쓴다며 얻어가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은 뒤란의 큰 감나무입니다. 감꽃이 피는 시기가 돌아오면 집 마당이 심심하지 않습니다. 나무는 셀 수 없이 많은 꽃을 무더기로 쏟아냅니다. 한동안 매일 쓸어도 그만큼 바닥을 채웁니다. 감꽃과 밤꽃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두엄간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갑니다. 나는 수북하게 쌓인 감꽃들을 마음대로 바닥에 펼쳐 무늬를 만듭니다. 꽃으로 꽃을 그리기도 하고, 사람의 얼굴을 비롯하여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들을 꾸며봅니다. 곧 떨어진 싱싱한 꽃으로는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거나 머리에 쓰는 화환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나 시인은 꽃을 먹어보기도 했다고 하는데 나는 입에 대본 일이 없습니다. 떫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땡감은 떫습니다. 달착지근하다는 말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직도 맛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말일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가을이 되면 나는 감나무에 대해 친근감을 드러냅니다. 감이 노란색을 보이기 시작하면 하루가 다르게 감나무를 쳐다보는 눈이 늘어납니다. 빨리 익었으면 좋겠습니다. 나 시인은 감나무의 변화 모습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시인의 눈으로 자세히 관찰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가 눈에 넣은 모습들을 다시 꺼내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 자세히 설명할 재간이 부족합니다.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같은 동질감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삶이 과정이 비슷하기에 느끼는 감정입니다.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그는 시골 태생입니다. 나도 시골 태생입니다. 보지 못했어도 친구 같은 마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