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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 졸업의 계절 20240220

by 지금은

누군가 말했습니다. 2월은 썩은 달이라고. 봄이 오는 길목은 유난히 불규칙한 날씨입니다. 올해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기온이 널뛰기하고 비가 구질구질 내리더니만 폭설로 변해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엊그제는 제주도와 전라도 지방에 겨울치고는 상상할 수 없는 폭우가 내렸습니다. 절기로 보아 우수(雨水)라고는 하지만 제주도 331밀리, 광주에는 133밀리의 비가 내렸습니다. 홍수는 물론 인명피해까지 났으니, 하늘도 무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날씨야 어떻든, 계절이야 어떻든 사람의 삶은 이어집니다. 계획에 따라 학교는 졸업이라는 것을 통해 수확의 결실을 거둡니다. 3월이 되면 열매를 얻기 위해 또다시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농사처럼 인간의 파종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교직에 있었던 관계로 아직도 아이들을 눈에서 놓지 못합니다. 학교를 지날 때는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안을 들여다봅니다. 교실 안을 살펴볼 수는 없지만 운동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습니다. 활기차게 뛰노는 모습에서 지난날의 나를 발견합니다.


며칠 전에는 학교 옆을 지나가는데 운동장 가장자리에 있는 농구장에 풍선 아치가 보였습니다. 멀리서 볼 때도 행사가 있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울타리 너머로 제법 멋진 오색의 풍선들이 띠를 이루었습니다. 풍선 아치 외에는 보이는 게 없지만 즉시 알아차렸습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요 며칠 사이에 졸업식이 있었다고 생각하게 했습니다. 지난달부터입니다. 가끔 꽃다발을 든 사람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이, 젊은이, 중년도 보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졸업 시기입니다. 텔레비전을 통해 졸업식 장면을 보았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만학도의 졸업식 장면을 보면서 마음이 뭉클했는데 말입니다. 순간의 감정이었을까요? 쉽게 잊었지만 쉽게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시절입니다.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습니다. 삶에 부대끼다 보니 까막눈으로 지냈습니다. 노년이 되어서야 문해교육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니 내가 있는 곳이 천국이나 다름없다고 했습니다. 최고령의 할머니가 졸업식에서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답니다.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딸이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동안 영어를 부지런히 익혀서 딸을 찾아가면 외손자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싶답니다. 그의 표정이 어느새 손자에게 가 있는 느낌입니다.


나는 졸업에 대한 특별한 기쁨이나 즐거움은 없습니다. ‘졸업식이 어땠어.’ 누군가 물어본다면 ‘그저 그랬지. 뭐’ 하는 표현일 겁니다. 그래도 굳이 말하라면 초등학교 때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습니다. 졸업식장은 오로지 덥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아침부터 몹시 추웠습니다. 눈도 많이 쌓였습니다. 할머니는 운동장에서 졸업식을 하니 추울 거라며 얼지 말라고 옷을 몇 겹이나 입혀 주셨습니다. 학교에 도착하고 보니 장소가 교실로 변경되었습니다. 졸업식이 시작되었습니다. 교단의 앞에는 졸업생들이, 뒤편에는 재학생들이 자리했습니다. 맨 뒤에는 학부모들이 공간을 메웠습니다. 하필이면 내 옆에 난로가 있을 게 뭡니까. 불이 이글거립니다. 장작이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활활 타오릅니다. 연통마저 붉게 물들었습니다. 한여름의 뙤약볕을 연상케 합니다. 몸이 서서히 근지러워집니다. 땀이 등과 목덜미를 적십니다. 얼굴과 머리에서 땀이 맺혀 목덜미를 향합니다. 손으로 얼굴과 목덜미를 훔쳤습니다. 대야에 손을 넣었다 뺀 것처럼 흥건히 손바닥을 적십니다.


자리를 바꾸고 싶어 옆의 친구를 힐끗 보았습니다. 긴장한 듯 돌부처입니다. 반대편을 보고 앞을 보아도 석고상처럼 미동도 없습니다. 신성한 자리이고 높은 분들이 앞에 있으니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칠 것 같다는 말이 적당합니다. 손에 쥔 졸업장이 젖었습니다. 육 년 동안 땀이 맺은 결실이 아직 덜 여물었는지 모릅니다. 홀로 집으로 향했습니다.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허전한 생각보다 눈 쌓인 길을 걸으니,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졸업의 기억을 되살리며 풍선 아치가 있는 곳에 서보고 싶었습니다. 울타리를 돌아 정문에 이르렀습니다.


‘용무가 있으신 분은 허락받고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텅 빈 운동장, 교문은 열려있지만,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이유가 있어야겠는데 합당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등을 돌리고 먼발치에서 휴대전화를 들었습니다. 풍선의 아치 속으로 내 몸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치가 허리에 걸쳤습니다. 주인 잃은 체육복 몇 장이 구겨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습니다. 이렇듯 그동안 졸업식의 풍경도 많이 변했습니다.


내 졸업식이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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