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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리 Jun 06. 2020

무남독녀 외동딸의 결혼 허락받기

내가 서른이 되던 그 해의 첫날, 아버지는 예비 사위의 인사를 받았다. 두 번째 만남이었다. 첫 번째는 4개월여 전인 8월, 동아리 동기들 같이 울산 집으로 놀러 갔을 때였다.(그와 나의 부모님의 첫 만남) 그때 아버지는 누가 봐도 착해 보이는 그를 보며, 저런 놈(?)을 데려오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그의 외모와는 다르지만, 그 역시 상견례 프리패스 상이다. ⓒ구글 검색



80년대 중반,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표제어는 우리 집의 모토였다. 부모님의 허니문 베이비로 생겨난 나는 어쩌다 보니 우리 집의 첫 자식이자, 마지막 자식이 되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다 보니, 우리 집의 중심은 모두 나였고, 나는 정말 말 그대로 금이야 옥이야 대접을 받으며 자랐다.  


특히 아버지와는 아주 돈독했다. 보통, 자식이 엄마와 친한 것은 흔한 일이지만, 나는 아빠와도 사이가 좋았다. 우리 가족은 주말마다 가족끼리 시간을 함께 보냈다. 주말 농장 텃밭을 가꾸며, 바닷가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봄마다 경주 벚꽃놀이를 다니며, 휴가 때는 멀미하는 엄마 대신 내가 지도를 보고 길 안내를 하며 전국일주를 하는 등 언제나 셋이서 함께였다.


좀 더 커서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나는 아빠의 출근 시간에 맞춰 일찍 일어나 등굣길에 아빠 차를 타고 다녔고, 내가 야자 또는 학원 갔다 늦게 집에 올 때는 아빠가 항상 아파트 단지 입구에 마중 나와 있었다. 체육 시간에 공에 맞아 안경이 부러져 앞이 잘 안 보일 때는, 야자 전 저녁 시간 때 아빠가 야근을 하다 말고 나와 안경을 맞춰주고 다시 회사에 복귀하기도 하였다. 대학을 서울로 간 뒤에는 가끔 울산에 올 때, 나는 거의 버스를 탄 적이 없다. 아빠가 항상 친구들과 만나는 곳에 데려다주고, 모임이 끝나면 데리러 오고 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면허는 있지만 운전은 못한다.)


이렇게 모든 일상마다 아빠와 함께한 순간이 많았고, 이를 아는 내 주변 사람들은 나의 남자 친구가 나와 결혼하려면 '아버지의 허락'이라는 난관을 뚫기 쉽지 않겠다고 예상하곤 했었다. 보통 이렇게 딸을 아끼는 아버지는 사윗감을 도둑놈으로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주변에 보면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예비 장인어른께 고군분투를 했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었다. 결국은 가족이 되고, 예뻐할 것이지만 일단 인사 오는 순간은 '고이 키운 내 딸을 데려가려는 나쁜 놈'이니까.


과연 우리 집은 어땠을까.






2015년 1월 1일 저녁, 부모님과 나는 비행기를 타고 양 손 무겁게 온 C를 울산 공항에서 맞이했다. 화려하고 커다란 과일 바구니와 묵직한 금빛 보자기 하나, 그리고 본인의 짐을 넣은 가방을 메고 멀리서 C가 걸어오는 모습은, 누가 봐도 인사를 드리러 오는 예비 사위의 모습이었다.


부모님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C는 중간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꽃집에 들어가 꽃다발 하나를 받아와 조수석에 있는 엄마에게 건넸다. 꽃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미리 준비한 C와 나의 비밀 무기였다. 꽃다발은 매우 예뻤고, 부모님은 활짝 웃으셨다. 그렇게 서프라이즈 선물을 하며 화기 애애해진 분위기와 함께 우리 집에 도착했다.


C가 갖고 온 선물 중 과일 바구니는 엄마가 평생(?) 간직해 온 로망이었다. C가 정식으로 인사를 온다고 했을 때, 엄마는 선물로 과일 바구니 하나면 된다고 하였다. 백화점에서 비싼 과일들 종류별로 담아서 파는 그런 과일바구니, 내 돈 주고 사기에는 돈 아깝지만 누군가가 사주면 무척 좋을 것 같은 그런 선물. 아, 받고 싶은 것이 명확한 사람의 로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조금 비싸면 어떠랴 이럴 때 기분 내는 것이지. 그리하여 C는 인천에서부터 그 과일 바구니를 갖고 울산까지 내려왔다.



 우리의 서프라이즈 선물 꽃과 열대과일 가득한 바구니 ⓒ과거 사진첩



그런데 저 묵직한 금빛 보자기는 무얼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식탁 위에 올려놓고, 보자기를 푼 순간. 모두 입에서 감탄이 나왔다. 나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C의 비장의 선물은 바로 '투뿔 한우'였다. 와아, 하얗고 붉은 마블링 자태를 고이 간직한 그 한우는, 박스 안에서 영롱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투뿔이라니. 과일 바구니도 처음이지만 이런 한우 선물도 처음이었다. 놀라는 우리 가족을 두고 C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본인의 '서프라이즈 선물'의 반응에 만족하는 얼굴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C가 큰돈을 썼다. 첫인사 오는데 50만 원이 넘는 돈을 쓴 것이다. 대단하다.)



영롱한 한우 ⓒ과거 사진첩
선물 3종 세트 ⓒ과거 사진첩


곧이어 어머니께서 식탁을 차렸다. 나조차도 먹어본 적 없는 메뉴들로 상이 차려졌다. 와, 일단 아버지 생신 기념이니 미역국은 기본에, 갈비, 그리고 예비 사위 왔다고 새로운 메뉴인 청어 과메기에 꼬막무침까지. 식탁이 가득 찼다. 아버지는 하나하나 메뉴 설명을 해주시면서, 원래 과메기는 청어로 만들었는데, 청어를 구하기 힘들어 꽁치로 만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대중화가 되어 지금은 꽁치 과메기가 더 널리 알려졌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러면서 이 과메기는 백화점에서 '청어'로 만들어진 것을 산 것이라는 말씀도 빼놓지 않으셨다. 그 날 C는 태어나서 과메기를 처음 먹어봤다. 그리고 밥을 두 그릇 먹었다.


아버지 손은 찬조출연 ⓒ과거 사진첩


새해부터 배 터지게 먹었다. 밥을 먹는 동안 결혼의 ㄱ 얘기도 없이 우리는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 옛날 친구일 때는 얼마나 친했는지, 우리가 얼마나 닮았는지 등등의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는 사이에 이번에는 아버지의 비장의 무기를 대령한 상이 차려졌다. 사실 아버지는 꽤 오래전부터 예비 사위의 인사를 기다려왔다. 몇 년 전 여행 중 면세점에서 구매한 '발렌타인 30년산'을 고이 모셔두면서, 이 술을 같이 마실 사윗감을 기다려왔더랬다. 내가 취직을 한 후부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결혼 이야기를 하셨고, 이렇게 누군가가 정식으로 인사 오는 날을 손에 꼽았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그 원을 푸는 날이다. 어머니는 과일 바구니로, 아버지는 발렌타인 30년산 술로 두 분의 원을 풀었다.


과일은 C가 갖고 온 바구니에 있던 과일이다. 아버지 생일 케이크와 함께 ⓒ과거 사진첩


그날 밤, 귀한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도, 예비사위들이 흔히 말하는 '행복하게 해 주겠다'와 같은 레퍼토리도 없었다. 그저 살아오면서 재미있었던 얘기들, 추억을 곱씹을만한 얘기들을 하면서 배꼽을 잡고 웃었을 뿐이다. 그렇게 기억을 함께 공유하면서 우리는 친해지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매년 아버지 생신 즈음에 돼지 저금통 배를 가른다. 거실 한 켠에 저금통을 두고, 1년 동안 부모님께서 오며 가며 돈을 넣고, 내가 집에 오면 배를 갈라 돈을 꺼낸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는 대게를 사 먹는다. 비싼 메뉴지만, 이렇게 모은 돈으로 사 먹으면 1년을 마무리하는 느낌도 들고, 경제적으로 크게 부담도 안 되고, 무엇보다 재미있어서 나름 우리 집에서는 전통이 있는 행사이다.


다음 날 오전, C와 나는 돼지의 배를 갈랐다. 무더기로 나온 동전과 지폐를 열심히 셌다. 그리고 나온 30여만 원을 들고 우리 가족은 정자항으로 갔다. 주로 박달대게를 먹었지만 이번엔 새로운 메뉴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예비사위도 왔으니, 그동안 우리도 못 먹어본 더 비싼 것으로. 킹크랩으로. (물론 이날은 돈을 훨씬 더 썼다.)



대게도 먹고, 회도 먹고, 탕도 먹었지만 사진으로 남은 것은 킹크랩뿐. 꿀맛이었다 ⓒ과거 사진첩



세상 어느 손님을 이렇게 대접할까. 부모님은 나를 아껴주셨던 그 이상으로 우리 집에 온 C를 챙겨주셨다. 나의 남자 친구를 '도둑놈'이 아닌 '나를 혼자 두지 않고 언제나 함께할 동반자'로 보았다. 부모님은 자식이 하나이기에, 혹시라도 언제든지 부모의 부재가 일어났을 때 세상에 혼자 남겨질 나에 대한 걱정이 먼저였다. 그래서 일찌감치부터 결혼하라고 성화였었고, C와는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다 하니 얼른 정식으로 인사 오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다 해주시고 싶어서. 나의 부모님에게 사위는 내 딸을 데려가는 놈이 아니라 내 딸과 함께 해줄 놈이었고, 그놈은 우리 부모님이 잘해주고 싶은 놈이었다. 사실 나는 한 번도 아빠가 나의 남자 친구를 두고 질투(?)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주변의 우려와 달리 C는 무혈입성(?)하여 무언의 결혼 허락을 받았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길, C의 양손에는 무거운 박스들이 들려 있었고, 가방도 꽉 차 지퍼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짐이 많아서 인천 집에 연락하여 공항에 데리러 오라고 연락할 정도였다. 일단, 그의 가방 속에는 아버지가 선물한 열대어 구피와 어항이 있었다. 거실에서 키우고 있는 구피 수족관에 C가 관심을 보이자, 아버지는 바로 마트에 가서 새로운 집이 될 미니 수족관과 장비들을 사고 건장한 구피 스무여 마리를 선물했다.(구피들은 아직도 인천에서 잘 크고 있다. 아버님께서 키우신다.) 그리고 손에 든 박스 안에는 대게 여러 마리가 고이 뉘여 있었다. 인천에서는 대게 먹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만 맛있는 것을 먹을게 아니라 인천에 계시는 부모님도 같이 맛보면 좋겠다며 우리가 먹은 것보다 더 많은 양의 대게를 C 손에 들려 보낸 것이다. 그날 밤, C의 집에서는 누나, 매형들이 모여 대게 파티가 벌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을 위한 첫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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