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살, C를 처음 만난 때이다. 그를 안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에게 두 명의 누나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삼대독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우리 또래는 독자가 흔하긴 하지만, 그래도 삼대에 아들이 하나씩만 있어, 삼대독자까지 내려오는 집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옛날에는 삼대독자면 군대도 현역으로 보내지 않았다.(언제 적이더라) 어쨌든 그만큼 손이 귀한 집이라고 생각했다. 누나 둘에 삼대독자라니, '나중에 C랑 결혼하는 사람은 어떡하냐' 하는 생각이 당시에 잠깐 머릿속에 스쳤었는데, 세월이 흘러 내가 그 집의 며느리가 되고자 하고 있었다. 와, 사람 일은 모른다더니... C와 잘 될 때는 사랑에 눈이 멀어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결혼이라는 것이 현실로 다가오자 오만가지가 걱정되었다. 특히 '시월드'와 관련해서는 미지의 공포에 떨었었다.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주변 선, 후배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했고 (막상 동갑 친구들 중에서는 내가 빨리 결혼한 편이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현실적인 시월드가 있었다. 물론 가족이지만, 좋기는 하지만 그래도 살아왔던 삶의 방식이 달라서 부딪히는 에피소드들이 있었는데, 그런 얘기들을 들을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온갖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C가 무심코 말하는 집안 얘기 하나하나에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렇게 적절한 이미지가 있을 줄이야 ⓒ구글 검색-영광군민신문
일단 C는 막내에다 유일한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모범적이고 공부도 잘하고 착해서, 집에서는 정말 자랑스러운 아들일 것이다. 그렇기에 부모님이 '내 아들 최고' 모드이면 어떡하지. 물론 잘난 것은 맞지만(내 눈에 콩깍지), 아들을 치켜세우고자 옆에 있는 사람을 무시하는 광경을 많이 봐왔기에, 괜히 걱정이 되었다. (며느리가 잘났어도 무시하는 분들은 어떻게든 무시를 하더랬다.)
아니면, 태어나서 서른 살 되는 때까지, 군대 간 것 외에는 자취도 하지 않고 집에서 지냈던 아들이기에, 결혼하면서 집에서 나가게 되면, 아들 뺏긴 것 같다고 하면 어떡하지. 내 아들 홀랑 홀려서 데려갔다고 하면 어떡하지. 분명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걱정이 아주 다방면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몹시 걱정할 때마다 C는 그럴 일 없다며, 우리 부모님, 우리 누나들은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얘기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인터넷과 주변에서 많이 봐왔지 않는가, 남자들은 본인은 괜찮다고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을. 그의 말을 흘려들으면서, 나는 가운데서 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 또 강조했었다.
그렇게 2015년 2월 15일, 설날 직전 주말에 그의 가족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양손이 무겁다 못해 들 수 없는 수준의 짐들이라 C를 불렀고, 그가 아버지 차를 몰고 데리러 왔다. 그의 집에 인사를 가기 위해 어떤 선물이 좋겠느냐는 질문을 했을 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말했었다. 아, 이 무슨 난제란 말인가.
아. 무. 거. 나. 라니.
우리 집은 뭐든 괜찮아.
C는 이렇게 말하는 스타일이었다. 앞서의 걱정이 괜히 들었던 것이 아니다.
아무리 아무거나라고 해도 그가 우리 집에 갖고 온 선물들이 있는데, 그리고 그가 준비하는 모습을 다 지켜봤을 가족들이 있는데, 진짜 아무거나 일 수는 없었다. 비슷한 금액대의 선물을 고민하다가, 결국 나도 똑같이 '투뿔 한우'를 메인으로 사 가기로 했다. 우리 집과 마찬가지로 그의 집 역시 백화점 한우는 흔히 먹지 않을 것이고, 그는 고기를 좋아하니까. 그리고 다른 선물들은, 비주얼로 승부한 과일 바구니 대신 양으로 승부한 과일 상자를 사 가기로 했다. 한라봉, 천혜향, 레드향. 제주도 지인을 통해 주문하여 맛이 보장되고 양도 많은 그런 과일 박스였다. 꽃 대신으로는 쿠기 굽는 친구에게 수제 쿠키를 주문하여 갖고 갔다. 아무래도 누나들, 매형들에 조카까지, 가족이 많다 보니 다양하게 먹을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금액대는 모두 비슷하게 맞췄다. (한우 36만 원 + 과일 15만 원 + 꽃/쿠키 5만 원) 이렇게 준비하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역시 오가는 선물의 수준은 비슷한 것이 좋다.
대신 비주얼은 차이가 좀 났지만. 아래 양말상자 같은 박스는 쿠키 박스다. ⓒ과거 사진첩
먼저, 인천의 한 횟집에서 그의 가족들을 만났다. 그의 아버지, 어머니, 큰 누나, 큰 매형, 조카, 작은 누나, 작은 매형까지. 우리 둘 까지 더하면 총 아홉. 와 정말 대가족이다. 3개 테이블에 차려진 상은 거대했다. 북적이는 분위기는 낯설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반대로 C가 우리 집에 왔을 때는 얼마나 단출했을까.
작은 누나와 (예비) 작은 매형은 이미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사이였다. 그때 스쳐 지나갈 때는, 우리 중 누구도 이렇게 다시 만날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었는데, 인연이란 참 신기했다. 다른 가족들은 처음 봤는데, 삼 남매가 어머님, 아버님과 묘하게 다른 듯 닮아 있었다. (유전자 조합이란 놀라운 것!) 특히 어머님을 보았을 때, 그동안 C가 '우리 엄마 착해!'라고 외치던 것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가 갔다. 왠지 손자, 손녀들이 응석 부리면 다 받아줄 것 같은 포근함이 있었다. 애틋한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나의 할머니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한 느낌이었다.(나는 친할머니와 깍듯한 사이여서 이런 느낌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외할머니는 내가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셨다.)그의 가족을 만나는 순간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해 온 걱정은 '모른다는 것'에서 오는 기우였음을. 대화를 하면서, 바짝 긴장했던 나의 모습은 점점 편해지고 있었다.
C의 가족들은 나를 만나기 전부터 매우 호의적이었다고 했다. 일단, 누나들이 보기에는 말라서 매력적이지도 않고, 맨날 별 찍으러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동생이 걱정이었는데, 멀쩡히(?)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그 자체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그런데 이미 서로 오래전부터 알고 있어서 취미로 딱히 싸울 일도 없는 데다가(C가 전 여친과 취미로 갈등이 있었던 것을 가족들도 알고 있었다.) 삼 남매끼리도 맞지 않았던 식성이, C와 내가 비슷하다고 하니 아주 마음이 편했던 것이다. 아들이 별 보러 다닌다는 것이 가족들에게는 세상 신기한 취미였는데, 그것에 똑같이 눈을 반짝이고 있는 애가 옆에 있으니 진짜 인연인가 싶기도 하고, 아들의 짝으로 딱이다! 싶었던 것 같다.
특히 C의 가족들에게 나에 대한 첫인상을 강렬하게 남긴 일이 있었는데, 사귄지 얼마 되지 않아 간 제주도 여행에서 내가 그와 함께 '용눈이 오름'을 올랐던 일이 그것이다. 언뜻 들으면, 아니 오름에 오른 게 뭐가 인상적인 거지? 싶지만, 그의 히스토리를 듣다 보니 왜 가족들이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용눈이 오름 파노라마 ⓒ과거 사진첩
이야기는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오름에 오르는 것을 좋아했다. 제주도 여행을 가면 꼭 코스에 '용눈이 오름'에 올라가는 것을 넣곤 했다고 한다. 전 여친과도 그렇게 제주도 여행에 가서, 같이 용눈이 오름에 올라가려고 했었는데, 실패했다. 분명 일정을 짤 때는 같이 가자고 동의했던 여자 친구가, 막상 오름 앞에 도착하니까 올라가기 귀찮다고 C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C가 그 일정을 포기하거나, 혼자 다녀와야 하는 것인데, 결국 C는 혼자 다녀왔다.(너무 오래 걸릴까봐 잠깐 오르다 내려왔다고 한다.) 그리고 말없이 다음 여행지로 이동했다. 그 날 C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그냥 여자인 지인과 동행한 제주도 여행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물론, 단순 동행이므로 그 여자 지인이 굳이 같이 오름에 올라갈 이유는 없었지만, 그에게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기 좋은 두 번의 경험이 쌓인 것이다. 자 이제 삼 세 번의 똑같은 경험이 쌓인다면, 이제 그의 머릿속에는 '여자들은 (나와 함께) 오름에 오르는 것을 싫어한다.'는 오류가 입력될 터였다. (한국인은 삼 세 번이지!) 그는, 애초에 싫다고 얘기했으면 일정에 넣지 않았을 텐데, 다들 괜찮다고 하더니 왜 막상 도착하니까 차에서 안 나오려고 하는 거냐며 억울해했다.
그리고 대망의 세 번째, 그와 사귀게 된 내가 같이 제주도에 갔다. 그는 용눈이 오름을 코스에 넣었고, 나는 거기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가자고 했다. 그리고 같이 올라갔다. 해 질 녘 오름 위의 세상은 아름다웠고, 우리는 멋진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11월에는 오후 4시~5시에 오름을 오르면 붉어지는 노을빛과 함께 멋진 풍경을 사진에 담을 수 있다. 당시 나는 그의 히스토리를 모르고 천진난만했고, 우리는 그렇게 2시간을 넘게 오름 위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해가 질 때까지. 나는 오름에 올라가면서 과거에 이 오름을 오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보다 4년 전쯤 혼자서 여행 왔을 때, 성산일출봉 근처의 민박집에서 묵었는데, 당시 일출 투어로 올랐던 오름이 용눈이 오름이었다. (그때는 목적지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상태에서 비몽사몽 올랐다.)
어떤 뽀샵도 들어가지 않은 사진. 이러한 빛을 즐길 수 있다. ⓒ과거 사진첩
그는 삼세번만에! 용눈이 오름 정상까지 올라와 본 것은 처음이라며 무척 기뻐했고, 나는 멋진 사진을 남긴 것에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이 얘기를 들은 그의 가족들은 박수를 쳤다. 드디어 우리 아들이, 동생이 제대로 짝을 만난 것 같다고. 이전 에피소드들에서 잘못된 것은 없다. 그냥 그와 그들이 맞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냥 잘 맞는 사람 둘이 만나 추억을 쌓았을 뿐이다. 그의 가족들은 이런 포인트를 캐치한 것이고, 마음이 활짝 열린 것이다. 아마 그와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환영했을 것 같지만, 어쨌든 적임자는 나였다.
이거슨 셀카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셀프로 찍은 사진들로 웨딩스냅을 꾸렸다. 앞으로 사진들은 점점 진화한다. ⓒ과거 사진첩
회를 먹고 나와 그의 집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준비해 간 선물을 집으로 옮겼다. 드디어 한우를 오픈할 시간. 울산에서 있었던 반응 못지않게 탄성이 나왔다. 커다란 과일 상자 3개 또한, 양을 보고 탄성이 나왔다. 하지만 생각보다 반응이 제일 좋았던 건, 친구가 만들어준 수제쿠키에서였다. 각 재료의 맛이 풍부하게 느껴지는 쿠키의 맛에, 그리고 친구가 직접 만들어서 판매한다는 이야기에 가족들은 적극적인 리액션을 보였다. 가족들의 반응을 보니 C가 말한 '아무거나 괜찮다.'는 말의 의미가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고기는 언제나 옳고, 쿠키는 맛있었다. ⓒ과거 사진첩
'우리 아들이 최고'는 없었다. 반대로 누나들은 내가 C를 구제해준 것처럼 고마워했다. 오히려 이대로 집을 안 떠날까봐 걱정했다고 한다. 부모님은 내내 둘이 사이좋게 지내기만 하면 된다, 너네만 행복하면 된다고 강조하셨다. 그 날, 그의 집에서 내가 준비해 간 과일과 쿠키를 맛있게 먹었고, 어머님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자식들에게 남은 과일을 나눠주셨다.(쿠키는 거의 다 먹었다.) 큰 누나네, 작은 누나네(3월 결혼을 앞두고 이미 분가해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자취하고 있는 나를 위한 묶음까지. 이미 어두워진 밤, 서울 집으로 돌아가는 나를 데려다주라고 하셔서 C와 같이 나오는데, 문 앞에 놓인 여러 보따리를 보면서, 그중에 하나를 들고 나오면서, 참 '다복(多福)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느낄 수 없었던 공포의 시월드는, 결혼 후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없다. C의 말대로 정말 '우리집은 안 그래'를 실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