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리 Jun 20. 2020

상견례, 본격 결혼 준비의 시작

상견례에서 우리가 결정한 것들

우리는 결혼을 준비할 시간이 많았다. 각 자 양가에 인사는 2015년 1~2월, 실제 결혼은 2016년 봄에 했기 때문이다. 1년 이상의 시간을 연애를 하며, 결혼을 준비하며 보냈다. 그러다보니 고민의 시간이 길었다. 사실 결혼 준비 항목은 대부분 비슷비슷한데, 주어진 시간이 많다보니 결정만 미루게 되는 것이다.


2015년 봄에는 결혼식장과 신혼집을 고민하느라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발품을 판 실체가 있는 고민도 아니고, 인터넷에서 손품만 판 고민을 하였다. 아, 이제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겨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 싶을 때, 상견례를 했다. 상견례를 결혼 준비 마지막에 하는 집들도 있었지만, 우리는 일단 상견례부터 해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먼저 했다. 어른들 또한 '얼굴 한 번 본적이 없다.'는 것에서부터 오는 마음의 거리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집은 걱정이 많았다. C의 집은 세 번째 결혼이었지만, 우리집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참고 사항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 결혼 준비 과정은 남자 집 중심으로 되어 있어, 남자 집에서 요구하는대로 준비하는 내용이 달라지는 상황이었다. (요즘은 여자쪽에 '꾸밈비'라는 것을 주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예단'이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구글검색 - SFG



그래서 일단 만났다. 이 모든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무더운 8월, 아버지의 여름 휴가에 맞춰 나의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오셨다. 열심히 손품을 팔며 알아볼 때는, 상견례는 여자쪽에서 하는 것이다, 혹은 남자쪽에서 하는 것이다, 또는 어느 쪽이든 초대한 쪽에서 돈을 내는 것이다, 만나는 양가 가족 수는 맞추는 것이 좋다 등등 기준이 다양하게 있었다. 제각기 다른 기준들이 전부 진리인 것처럼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말 보다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우리가 이해할만한 수준으로 모든 것을 진행했다. 그리하여, 한반도 끝(울산)과 끝(인천)에 살고 있는 가족이 서울에서 만났다. 이동 편의, 비용 등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상견례에서 만나는 가족은 우리 가족 3명, 그의 가족 5명이었다. 부모님과 결혼 당사자들만 보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는 모두 결혼 전에 한 번 봤으면 해서 다 같이 만났다.(결혼식장에서 처음 보고 인사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어쨌든 꽤 인원이 있으므로 나름 상견례 장소 예약에 심혈을 기울였다. 나는 장소를 탐색하고 예약하는 역할을 했는데, 일단 8명이 식사를 해야 하므로 너무 비싼 곳은 피하고 싶었다. 보통 한정식 집을 많이 가는데 대부분 5만원이 기준인 것 같았다. 그런데 다들 평이 한정식은 음식이 너무 많이 나온다고, 긴장된 자리라 많이 먹지도 못하는데 아깝다는 내용이 많았다. 그리고 음식을 셰어하는 구조라 상견례 같은 어려운 자리에서는 먹기 힘들다는 말도 있었다. (저 멀리 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일어나서 떠오는 걸 생각하면)


여러가지 분위기를 고려하여 나름 바깥 뷰와 분위기가 좋고, 분리된 공간에, 개인 별로 음식이 나와 나눌 필요가 없으며, 디너 코스는 비싸지만 런치 코스는 조금 저렴(인당 4만원)하여 한 번 가 보고 싶은! 나름 당시 검색에서는 상견례 장소로 추천할만한 곳으로 꼽히던 곳을 예약했다.(지금 검색해보니 가게는 없어진 것 같다.) 그 때만 해도 나는 나중에 벌어질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매우 뿌듯해 하며 준비했다.






상견례 날, C는 본인의 차로 나의 자취방에 부모님을 모시러 왔다.(봄에 드디어 뚜벅이 탈출하며 첫 차를 샀다.) 그의 부모님은 누나들이 모셔왔다. 보통은 양 가 집안 사람들이 상견례 장소에서 만나게 될 테지만, 우리는 C가 먼저 나의 집으로 왔다. 본인이 울산 갈 때마다 부모님께서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고는 하셨는데, 드디어 부모님께서 서울에 오셔서 본인에게도 모실 기회가 생겼다며 온 것이다. C는 그 날 하루 종일 부모님을 에스코트 했다.


거의 비슷한 시간에, C와 나, 우리 부모님과, 누나 둘과 C의 부모님, 그리고 조카까지 식당에 도착했다. 얼결에 주차장에서 첫 인사를 하게 되었다. 악수를 하며, "반갑습니다~"하는 인사를 나누며 안으로 들어갔다. 2층 손님은 우리만 있었고 편하게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우리가 상견례를 한 식당 ⓒ구글 검색



한반도 끝과 끝에서 평생을 모르는 사이로 살아온 분들이, 자식들이 맺어준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다. 굉장히 낯선 자리였지만, C와 나의 결혼이라는 공통 주제가 있었기에 대화가 진행될 수 있었다. 일단, 양 가 어른들이 모이니 서로 자식 칭찬부터 시작한다. '똑똑하고 야무지게 잘 컸다.', '착하고 배려심이 많다.' 등등 인생에서 들을 수 있는 칭찬은 다 나오는 것 같았다. 우리에 대한 얘기가 완벽하게 포장되어 오가는 말을 앞에서 듣고 있으니 얼굴이 붉어졌다.  


이 칭찬은 곧 부모님 서로 대한 내용으로 이어져 '세 명의 자식을 모두 바르게 키우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하나를 금이야 옥이야 키우셨을 텐데 혼자 서울로 보내고 걱정이 많으셨을 것 같다. 이제 우리가 가까이 있다' 등등의 대화가 오갔다. 아, 얼마나 훈훈한 광경인가. 그 가운데 앉아 있는 나는 민망해 죽을 것 같았지만, 이 자리는 좋은 말만 오가도 모자란 자리일테니. 모든 것을 좋게 하고 싶은 어른들의 노력이 마음에 느껴졌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 동안 몇 단계를 거치며 전해지느라 아리송했던 내용들을 모두 확실히 정리했다. 덕분에 이 기준들에 맞춰 더 수월하게 결혼을 준비 할 수 있었다.




· 예단 및 예단비 없음, 가족들의 별도 선물 없음

어머님께서 처음부터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둘째 누나 결혼할 때 예단 없이 진행했더니, 세상 편하고 좋았다고 하시면서 굳이 하지 말자고 하셨다. 아마 어머님께서 직접 말씀하기시 전에는 우리 부모님은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애들은 괜찮다고 전하는데, 이게 정말 괜찮은 것인지, 애들이 잘못 전한 것은 아닌지. 워낙 조심스러운 주제이다 보니 걱정을 하셨는데, 어머님께서 명확하게 말씀해 주셔서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덕분에 나는 예단 3종 세트나 예단비, 꾸밈비 등등 이러한 고민을 하나도 하지 않고 결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정말 너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 같아, 결혼식 직전에 양가 모두에게 옷 하나 해입을 정도의 돈만 드렸다. 정말 최소한이었다.



 · 결혼 날짜부터 식장, 결혼 내용 등은 모두 우리가 원하는 대로

결혼식을 2016년에 올리기로 하면서, 우리는 우리 둘의 일정 외에는 고민할 거리가 없어졌다. 양 가 집안에서는 모두 아무때나 괜찮다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겨울이 지나고, 최대한 빠른 봄에 결혼할 생각이라는 말씀을 드렸다. 날짜는 구체적으로 봐야겠지만. 


예전부터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결혼식의 모습이 있었고, 그것은 일반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모두 흔쾌히 받아들이셨다. 특히, 주례는 없을 것이고 양 가 아버님께서 축하편지를 읽으셔야 하니 미리 준비하셔야 한다는 말씀을 전했다. 나름 반년도 더 전에 고지한 셈이다. 그 때 아버님과 아버지는 정말 두 분이서 열과 성을 다하여 난색을 표했는데, 나는 이건 무조건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결국 결혼식날 아버님은 웃음바다, 아버지는 눈물바다를 만드셨다.  



 · 모든 돈은 집 구하는 것을 우선 순위로 하여 지출

지금, 부동산이 아주 난리지만, 2015년 그 당시에도 사실 서울의 집값은 체감상 비쌌다. 사회에 발을 디딘지 얼마 안 된 우리는 크지 않은 전셋집에도 '억' 소리가 나는게 낯설었다.(물론 지금에 비하면 쌌다. 그땐 그걸 몰랐다...) 사회 초년생인 우리가 아무리 저축을 열심히 했다고 해도, 서울에 아파트 전세를 들어갈만한 돈은 없었다. 그렇다고 양 가 중에 어느 집도 바로 서울에 집을 구해줄 수 있는 경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가진 돈을 영혼까지 끌어 모아야 했다. 그리고 그것에 맞춰서 집부터 구하기로 했다. 


그러다보니 여자는 혼수, 남자는 집 이런 것도 없었다. 집을 구하고 남은 돈으로 혼수, 신혼여행, 결혼식 준비 등을 하기로 했다. 신랑측, 신부측 나누어 돈을 지출한 것이 아니라, 일단 모든 자산을 합치고, 그것에서 하나씩 지출했다. 그러다보니 각자 누가 무엇을 해왔다 혹은 얼마를 부담했다가 없었다.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었다.



· 사주, 궁합 등은 보지 않기로

이 부분이 클라이막스였다. 대화를 나누면서 가장 빵 터진 부분이기도 하다. 조심스럽게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다. 혹시 둘이 사주나 궁합을 보실 생각이 있으시냐고. C의 집은 원래 그런 것을 보지 않는다고 하였고, 어머니는 그럼 다행이다 하면서 앞으로 보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가끔 철학관을 가셨었는데 (나의 진로, 취직 등) 이번에는 가지 않는게 좋겠다고 하였다. 어차피 결혼할 사이인데, 좋게 나오면 다행이지만, 안 좋게 나오면 찝찝할 수 있으니 차라리 모르는게 낫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지금까지 일부러 둘의 사주를 보지 않았는데, C의 집도 생각이 없다고 하니 한 시름 덜은 것이다. 살면서 보니 사소하지만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건, 우리가 비슷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집안 형편도 비슷하고, 월급 받는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가 계시는 가정 환경도 비슷하고, 동갑에다가, 둘 다 일반 고등학교를 나와 같은 대학에 들어가 졸업했고, 사회에 진출한 시기도 비슷했고(둘 다 스물여덟에 첫 월급을 받았다.), 연봉이 그다지 높지 않은 대기업에 근무하는 것도 비슷하다. 우리는 성향이 비슷해서 만났지만, 만나고보니 경제적인 상황도 비슷했다. 아마 그래서 딱히 갈등거리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와중에도 나의 자식이 잘났다 혹은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으니 그 집도 무엇을 해오면 좋겠다는 내용으로 전개가 될 수도 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훈훈해도 너무 훈훈했다. 덕분에 상견례 자리는 화합의 자리가 되면서, 갑자기 아버지들이 술을 찾기 시작했다. 운전을 안해도 되는 절호의 날이라고 하시며, 술을 시켰다. 아뿔싸.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원래 어른들이 술을 잘 마시지 않으시고, 점심 시간이라서 술을 마실 것이라는 생각을 아예 못한 것이다. 그런데 그 식당이 술 값이 엄청 비쌌다. 세상에 소주 한 병에 8천원이라니. 일식집이니까 사케를 마셔볼까? 싶었지만, 소주가 그 가격인데 사케라고 쌀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나마 제일 싼 소주를 시켰지만, 계속 마시다보면 가격대가 올라갈까봐 시원하게 마시지 못했다.


게다가 자리가 너무 편하게 이어진 덕분에, 다들 개인별로 나오는 코스를 다 드시고도 약간 부족해 하셨다.(원래부터 양이 많은 코스는 아니었다.) 메뉴를 새로 시키기는 애매한 상황이다 보니, 마지막 음식과 소주 약간을 곁들이게 되었다. 우왕좌왕, 아니 이 좋은 분위기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람. 나는 신경 쓴다고 쓴 부분들이 다 망해버렸다. 결국 소주 2병 정도를 드시고 약간 아쉬워 하면서 일어나셨다. (아니 아부지, 이렇게 주량이 세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왜이렇게 멀쩡하시죠!) 어른들은 다음 술자리를 기약하였다.



그날의 코스 중 일부. 사진쟁이인 우리 카메라에 있는 사진이 이것뿐이라니. 상견례란, 그런 어려운 자리인 것이다. ⓒ과거 사진첩



상견례 식사 결제는 C가 하였다. 나름 먼 길 오신 장인, 장모님께 대접하고, 막내로서 가족에게 대접한다는 의미로. 나는? 그 사이에 껴서 한 끼 얻어 먹는다는 의미로. 종합적으로 보면 결혼 준비하는 비용으로 포함될 것이었지만, 당시 명분은 그러했다.


그렇게 상견례를 마치고 나오며, C의 부모님은 누나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시 인천으로, 나와 우리 부모님은 C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동했다. 자, 상견례는 무사히 마쳤고, 이제 정말 우리만 잘하면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누나 둘 삼대독자 며느리 첫인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