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리 Oct 03. 2020

오로라 헌터, 직접 사냥을 계획하다

마음을 먹는 것이 반이다

처음 오로라를 보러 가고 싶다고 생각한 건, 2008년에서 2009년으로 넘어가는 스무세 살의 겨울이었다. 그때 나는 한 학기 교환학생으로 오스트리아 시골 마을에서 지내고 있었고, 틈만 나면 유럽 여행을 다녔다. 백야가 끝나고 밤이 길어질 때쯤 나는 북유럽 여행을 준비했다. 당시에 오로라를 보러 가려고 생각했던 곳은 노르웨이 트롬쇠. 노르웨이 땅 북쪽 끝에 있는 도시였다. 


하지만 그때는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전이라 정보가 제약적이었고, 북유럽의 물가를 감당하기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환율이 최악이었고(1유로에 1,800원), 무엇보다 박스 3개와 캐리어 하나면 끝나는 내 짐들 속에서 북유럽의 눈과 추위에 맞설 옷과 신발이 없었다는 것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결국 북유럽 여행은 대도시 위주로 3박 8일(4박은 야간열차), 유레일 패스를 제외한 예산 40만 원 이내로 다녀왔고, 오로라는 그렇게 마음속에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2014년, 어느덧 스물아홉이 되었다. 나는 이제 직장인이었고, 그 해에 소개팅을 15번 정도 했을 정도로 연애 사업 성사에 열중이었다. 그 해의 나는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어놨었다. 어떤 남자를 어떻게 만날지 모르므로, 돈은 항상 최대로 저축하였고, 언제든지 결혼할 수 있도록 미래의 스케줄 따위는 따로 잡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언제쯤 남자를 사귀어야 얼마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애를 낳을 텐데 하는 전형적인 라이프 사이클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십 대의 마지막이라 그랬을까, 어떤 초조함이 나를 감쌌던 것 같다. 


그러던 9월의 어느 날, 퇴근길 지하철역 플랫폼 위에서 친구 C와 톡으로 이야기를 하다가 정신이 들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왜 남자에게 종속된 삶을 살려고 하고 있지? 아직 남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건데, 왜 나 혼자서 맞춰줄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일단은 나를 위한 인생 플랜을 짜 보자. 결혼과 출산 중심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것부터 실천해보자.


이 생각이 스쳐 지나갈 때 나는, 오로라를 보러 가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전에 보려고 하였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했던 그것, 내내 아쉬움이 남아있던 그 여행을 나는 꼭 갈 것이다. 이런 생각이 미치자 나는 다시 자신감 있는 나로 돌아왔다. 그래 내 인생은 내가 계획해서 사는 거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에 내 미래를 맡기지 말자. 2015년 12월 말, 28일~31일까지 4일만 연차를 내면, 25일 크리스마스부터 다음 해 1월 3일까지 10일을 쉴 수 있다. 자, 서른의 마지막을 오로라와 함께 보내보자!  



그렇게 스스로를 다시 생각하고 자신감을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공교롭게 그 대화를 나누었던 친구 C와 사귀게 되었고, 오랜 시간 친구였던 우리는 사귀자마자 곧바로 결혼 얘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2015년은 결혼 준비로 바빴다. 우리의 결혼은 2016년 3월로 예정되어 있었고, 미리 생각했던 여행의 시점은 불과 결혼식 3개월 전이었다. 연말이 다가오자 나는 또 쭈구리가 되었다. 지금 이 바쁜 시점에 여행을 꼭 가야 할까, 오로라는 지금 안 봐도 나중에도 볼 수 있을 텐데, 너무 무리하는 것은 아닐까. 한 번도 포기했는데, 두 번째 포기가 어려울까. 그냥 오로라랑은 인연이 아닌가. 


거의 낙담하고 있을 무렵, 이 여행을 무섭게 몰아붙인 사람은 다름 아닌 C였다. 그는 앞서 나의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마음을 먹었을 때, 이번 기회에 꼭 다녀와야 한다고 하였다. 그 여행을 가지 않는다고 해서 과연 얼마나 결혼 준비를 더 할 수 있을까. 일 년 내내 쉼 없이 달렸는데, 석사 논문도 끝나고 강제로 부서를 옮기게 된 이때, 한 번 쉬어주지 않으면 몸과 마음에 탈이 날 것이다. 이미 연말연시, 휴일인 그때 무언가를 하기도 어렵고, 여행을 다녀와서도 시간이 남아 있으니 충분히 결혼 준비를 할 수 있다고 나를 설득하였다. 무엇보다도 오로라 사진으로 결혼식 사진전을 꾸미자는 그의 말에 나는 결국 여행을 가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당시는 오로라 여행이 막 알려지는 시기였다. 몇몇 프로그램에서 오로라의 멋진 광경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해외여행도 한창 붐이었다. 덕분에 제일 유명한 오로라 여행지는 캐나다의 옐로나이프였다. 오로라 사진으로 유명한 권오철 작가의 작품이 주로 그곳에서 촬영되었고, 도시 자체가 오로라 관광을 위해 활성화된 곳이었다. 아이슬란드 및 북유럽에서도 오로라를 볼 수는 있었으나, 기울어진 자전축을 중심으로 좀 더 남쪽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곳이 옐로나이프였다. 그곳은 겨울에 3일 이상 머물 경우 오로라를 관측할 확률이 90%가 넘어간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그래, 한 겨울의 침엽수림, 눈이 가득 쌓인 곳에서 오로라를 보자. 우리는 목적지를 옐로나이프로 정하였다.



ⓒ구글 검색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업체와 함께 다니거나, 스스로 찾아다니거나. 오로라를 찾아다니는 사람을 '오로라 헌터'라고 부른다. 오로라 관측을 사냥에 비유한 것이다. 제대로 오로라 관측을 하려면 태양 활동, 날씨, 계절, 월령 등을 고려해서 어둡고 시야가 뚫린 곳으로 떠나야 하는데 이를 오로라 헌팅이라고 한다. 업체의 경우 알아서 환경이 좋은 곳으로 데려다 주기 때문에 사실 관광객은 추위 대비 정도만 하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대략적인 촬영 가이드도 해준다. 옐로나이프의 경우, 아예 하늘을 보기 좋은 곳에 '오로라 빌리지'라는 시설을 두고, 오로라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오로라 사진에 나오는, 인디언 텐트가 보이는 곳이 오로라 빌리지이다. 


다만, 업체와 다닌 다는 것은 모든 스케줄을 업체의 뜻에 따라야 하고, 내가 무언가를 더 원하면 돈을 더 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우리는, 이러한 제약을 큰 단점으로 생각했고, 직접 차를 빌려 마음대로 오로라를 보러 다니기로 하였다. 모든 스케줄은 우리 마음대로. 오로라 예보도 직접 확인하고, 보온 장비 및 간식 준비도 직접 하고, 장소도 직접 찾아다니고, 오로라 촬영도 알아서 해야 하는 길로 가기로 한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직접 오로라 헌터가 되기로 하였다.






12월의 옐로나이프 기온은 영하 30도 정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추위와 맞닥뜨릴 준비를 해야 했다. 우리는 최대한 따뜻함을 유지해줄 옷과 소품들을 챙겼다. 영하 30도에서도 보온이 된다는 모델로 쏘렐 방한화 구입, 솜으로 가득 채운 겨울용 작업복 바지 구입 후 길이 수선, 구스 패딩과 보드복 모두 챙김, 각종 모자와 장갑, 목도리, 두꺼운 등산 양말 등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옷가지들은 모두 챙겼다. 뿐만 아니라 핫팩과 담요 또한 추가로 준비했다.


겉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을 챙긴 뒤, 이번에는 속을 따뜻하게 해 줄 것들을 준비했다. C는 강추위 속에서 체력 소모가 심할 테니 우리가 편하게 잘 먹을 수 있도록 먹을 것을 잔뜩 가져가야 한다고 했다. 기본적인 편한 끼니를 위해 (밖에 먹으러 나가지 못할 경우를 대비) 햇반과 레토르트 반찬류를 잔뜩 넣었고, 아예 보온병과 커피포트도 따로 가져갔다. 핫초코, 짜장범벅, 컵라면 등 차에서 추울 때 바로 따뜻하게 먹을 만한 것들을 모조리 챙겼다. 


촬영 장비 또한, 한 겨울의 환경에 대비를 해야 했다. 워낙 기온이 낮아 배터리가 빨리 닳을 경우를 대비하여, 추가 배터리 구입 및 완충, 얼어붙은 장비에 손가락이 달라붙을 경우에 대비하여 스펀지 등으로 삼각대 및 주요 장비 감싸기(혹은 장갑끼고 카메라 만지기). 카메라가 급격한 온도 변화에 노출되지 않도록 보냉 신경 쓰기(추운 환경에 노출된 후, 바로 따뜻한 숙소로 가져가면 장비 안 곳곳에 물기가 생길 수 있다.). 밤하늘의 별을 봐야 하니 두툼한 돗자리 챙기기. 이와 같은 기본적인 세팅에 얹어, 나름 웨딩 촬영 콘셉트로 사진을 찍기 위해 각종 소품들까지 가져갔다. 


첫날 촬영 후 얼어붙은 카메라. 절대 바로 따뜻한 곳으로 가져가면 안 된다. ⓒ과거 사진첩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하고, 드디어 우리는 2015년 12월 27일 시애틀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총 4박 7일의 일정. 우리는 2016년 새해를 돌아오는 길, LA공항에서 맞이할 것이다. 우리의 루트는 인천 - 시애틀 - 캘거리 - 옐로나이프 / 옐로나이프 - 캘거리 - LA - 인천이다. 굳이 미국을 거쳐서 들어간 이유는, 미국까지는 항공사 직원 티켓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결혼 전에 미리 혼인 신고를 했다...)


이렇게 드디어 우리는 오로라를 보기 위해 상상을 실천으로 옮기는 첫 발을 뗐다. 부디 돌아올 때는 황홀한 경험을 했기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