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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리 Oct 06. 2020

오로라 맛보기, 달빛 아래 고요한 숲 속에서

세상에 너와 나 둘만 있는 것처럼

25시간이 넘는 대장정이었다. 집에서 출발하여, 옐로나이프의 숙소에 도착하기까지. 각종 연착을 뚫고 간신히 옐로나이프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다. 매우 늦은 시간이었지만, 다행히 숙소까지 가는 셔틀이 있었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인 옐로나이프 인(현재는 다른 이름으로 운영)에서는 매 시간 공항과 숙소를 오가는 무료 셔틀을 운행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오로라 관광에 최적화된 운영을 하다 보니 이러한 편의를 제공하는 것 같았다. 체크인할 때 보니 그 숙소에서도 오로라 빌리지와 연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4박의 숙소 예약 중, 이렇게 첫날 밤이 지나갔다. 우리는 새벽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잠들었다. 장시간 비행의 피로를 해소시켜야 했다. 그리고 그 날 늦은 아침,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제 공항에서 차를 렌트하고, 본격적으로 여행을 다닐 것이다. 오후 3~4시면 해가 지기에 낮 시간은 짧고,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밤 시간은 길다. 우리는 오늘 밤 처음으로 오로라 헌팅을 다닐 생각에 몹시 흥분했다. 


어젯밤, 비행기를 타고 캘거리-옐로나이프로 넘어올 때, 우리는 비행기 안에서 오로라를 보았다.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저 멀리서 약간의 초록빛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 넘실 넘실 비행기 가까이로 왔다. 하지만 비행기 안은 밝았고, 비행기의 창문은 작았고, 밖을 볼 수 있는 각도는 좁았다. 그렇게 우리는 생애 처음 오로라를 보기는 하였으나, 입맛만 다셨다. 이제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오늘 본격적으로 다닐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본 오로라 ⓒ과거 사진첩


그 날은 매우 추웠다. 아침부터 옐로나이프의 온도계는 영하 30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름 최선을 다해 두껍게 입고 나갔는데도 금세 추워졌다. 최대한 빈틈없이 꽁꽁 싸맸으나, 밖으로 내보일 수밖에 없는 얼굴에는 구멍마다 얼음꽃이 피었다. 눈구멍의 눈썹에도, 콧구멍의 코털에도, 숨 쉬는 입가에도 하얗게 얼어붙었다. 아, 밖에서 이런 밤을 우리가 보낼 수 있을까? 괜히 한 겨울에 오자고 했나, 하는 후회가 약간 밀려왔다. 


2015년 12월 말은, 음력으로 갓 보름이 지난 시기였다. 사실 별을 보기 위해서,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는 달은 없어야 좋다. 빛 공해가 없는 깜깜한 밤하늘에 뜬 보름달은 정말 세상을 밝게 비춘다. 달이 밝은 만큼 별은 보이지 않는다.(낮에 해가 밝아서 별이 아예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내가 처음에 생각한 여행 기간에 월령은 고려되지 않았고, 이미 여행은 와버렸다. 우리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달이 밝으면, 그만큼 어둡지 않아 별은 많이 안 보일지 몰라도, 지상 풍경이 잘 보여 풍경과 별을 동시에 담을 수 있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오로라와 함께 멋진 풍경 사진을 남겨보자.




3일간의 오로라 헌팅 여정 ⓒC의 블로그



하여, 오로라 헌팅 첫날 저녁 우리는 도심 근처 부두에 가서 오로라를 보기로 했다.(위 지도 가운데, 1일 차 부두) 도심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부두 너머는 큰 호수라서 시야에 방해될 것이 없었고, 배를 배경으로 찍으면 멋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부두 쪽으로 가서 돗자리를 펴고 자리를 잡으며, 하늘을 보는데, 왜 점점 구름이 끼는 거지? 


분명 배 너머로 어스름하게 오로라가 보이는 것도 같은데, 사실 눈으로 보면 잘 모르겠다. 사진을 찍으니 초록색이 보이긴 하지만 맨눈에서는 존재감이 별로 없었다. 어, 이거 비행기에서 본 것보다 못한 것 같은데... 일단 하늘이 맑아져야 뭔가를 판단할 수 있을 텐데 계속 구름이 낀다. 아무리 오로라가 세도, 그 아래 구름이 껴버리면 지상에서는 오로라를 볼 수 없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는 맑은 하늘이 필수 조건인데, 왜 낮에는 맑다가 밤에 구름이 끼는 거니. 존재감이 어렴풋한 오로라 대신, 우리는 오리온이 낮게 떠 있는 고위도의 아주 추운 밤하늘을 즐겼다. 



오로라가 잘 보이도록 사진을 찍으면 ⓒ과거 사진첩


실제 눈에 보이는 것과 유사했던 밝기. 오로라의 어렴풋한 존재감. 오른쪽 아래 오리온자리가 보인다. 사진이 잘 안 보인다면 휴대폰 화면을 좀 더 밝게 ⓒ과거 사진첩



한 시간여가 지났을까. 아까 떠버린 달조차 보이지 않게 구름이 끼었다. 아무래도 오로라 건 뭐건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 같다. 일단 철수. 너무 추우니 숙소에 가서 몸을 녹이기로 했다. 정말 신기한 건 엄청 추운데 있다가 따뜻한 곳으로 가면 그렇게 졸리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대로 숙소에서 2~3시간 기절했다. 


자정쯤 눈을 떴다. 이대로 밤을 보낼 수 없지. 구름이 완전히 걷히지 않았지만, 다시 우리는 길을 나섰다. 이번엔 부두 방향이 아닌 새로운 길로. 아까 전, 부두 쪽으로 난 길에서 그 너머로 더 멀리 가려고 시도했는데, 길이 막혀 있었다. 아무래도 새 길을 뚫고, 옛 길은 막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새 길로 가자! 어차피 이 도시를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길은 하나뿐이다! 


그렇게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다가 처음으로 나오는 갈림길에서 우리는 큰길보다, 작은 갈림길을 택해서 들어갔다.(위 지도의 1,3일 차 주요 촬영지) 좀 더 오가는 차량이 적고, 조용한 곳을 향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vee lake 방향으로 길을 올라가면서 보니, 군데군데 옆으로 빠지는 틈새가 많았다. 도로가 나 있는 건 아니고, 약간은 숲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은 틈새에, 차들이 한 대씩 들어가서 세워져 있었다. 오호, 저 안에 차를 대고, 들어가면 주위에 오가는 차량의 방해 없이 별을 볼 수 있겠구나. 이내 우리도 곧 좋은 스폿을 발견했고, 틈새길 안으로 들어가 차를 댔다. 숲 안쪽으로 난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자, 사방은 눈 쌓인 침엽수림에 탁 트인 하늘이 나왔다. 오! 여기 완전 좋아!


 

좌) 언덕 아래, 우) 언덕 위 모습. 눈 쌓인 침엽수림의 풍경. 아직 구름이 있다. ⓒ과거 사진첩


일단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하늘을 보았다. 군데군데 구름이 걷히고, 슬슬 오로라도 보이는 것 같다. 적어도 아까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동화 속 눈의 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만끽했다. 아, 이게 겨울의 맛이지. 달빛이 발아래를 비춰주는 덕에 주변 풍경을 보는 것도, 그곳을 돌아다니는 것도 무섭지 않았다. 주변에 머리 꼭대기만 눈 위로 나와있는 나무들을 보면서, 과연 이 눈이 얼마나 높게 쌓인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것을 알 수 없어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오가서 다져진 눈길을 보면서, 허튼데 가지 말고 이 길 위에만 있으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마치 그 공간을 우리 둘이 전세 낸 것처럼,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달라지는 배경에 맞춰 오로라 사진을 찍으며 놀았다. 


그 날의 오로라 예보는 moderate. 예보(moderate. active. storm) 중 제일 약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분명 눈에는 보이고, 사진에도 오로라가 나오긴 하는데 TV에서 보는 것처럼 어마어마해 보이지는 않았다. 비행기에서 보았던 것보다는 더 잘 보였고, 더 오래 보았지만, 아직 아 그래 이것이야! 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첫날이니까. 괜찮다. 이게 첫 맛보기라면 만족한다. 


우리는 밤 새 그곳에 있었다. 오로라가 끝날 듯 끝나지 않고, 강해질 듯 더 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기한 건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진 찍고, 저렇게 사진 찍고, 요기 등장한 것도 보고, 저기 등장한 것도 보고, 그 사이 별똥별도 보고, 찍고, 그동안 단순히 깜깜한 밤하늘을 봐 오던 것과는 다르게 초록빛의 움직이는 커튼 너머로 빛나는 별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숲 속에서 우리만의 달콤한 추억을 쌓았다.


오른쪽에 아래로 향하는 별똥별이 찍혔다.
누워서 오로라는 보고 싶고, 발은 시린 자의 모습 ⓒ과거 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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