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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리 Oct 30. 2020

세계 최대 광학 망원경, VLT를 보러 가다

우리가 지구 반대편, 머나먼 칠레까지 신혼여행을 가게 된 이유. 그 시작은 '세계 최대 망원경을 보러 가자!'라고 외친 나의 제안 때문이었다. 나는 사소한 것에도 의미부여를 잘하는데, 신혼여행은 '그 어디보다 특별해야 한다'는 의미부여의 결정적 대상이었다. 신혼여행은 단 한 번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C는 쉽게 갈 수 없는 타히티를 탐냈고, 나는 좀 더 우리와 맞는, 우리 다운 의미가 있는 곳은 없을까 고민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문득 스쳐간 생각. 언젠가 한 번쯤은 칠레에 있다는 세계 최대 망원경을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깨어난 것이다. 이왕 한 번뿐인 신혼여행, 최대한 멀리 가보자!


Very Large Telescope를 줄여 VLT. 말 그대로 정말 큰 망원경 (공식 명칭: 초거대망원경) 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는? 과 같은 질문들을 보며 그 답을 상식으로 외우던 시절, '세계에서 가장 큰 망원경은?'을 질문하면 그 답은 VLT였다. 물론 지금은 지름 몇 백 미터를 넘나드는 전파 망원경이 단일 망원경으로는 제일 크고, 전파 망원경의 간섭계까지 합하면 그 범위는 가늠할 수 없는 정도지만, 기본으로 돌아와 빛을 활용한 가장 큰 광학 망원경이 무엇이냐고 한다면 아직 VLT가 최고를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잠깐 상식 : 단일 망원경 기준으로 최대 광학 망원경은 하와이 마우나케아 천문대에 있는 주경 10M짜리 켁1, 켁2 망원경이지만, 해당 망원경은 켁1과 켁2 두 대를 운용하여 최대 14M 크기의 효과를 낼 수 있다. 하지만 VLT는 8.2M짜리 거울 4대를 동시에 운영하여 16M의 크기에 달하는 효과를 갖기 때문에 현재 운영하는 기준으로는 아직도 VLT가 세계 최대 광학 망원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 칠레에 거대마젤란망원경(Giant Magellan Telescope; 이하 GMT)을 짓고 있는데 이는 8.4M짜리 거울을 7개 연결하여 약 25M의 효과를 낼 예정이다. 2023년부터 네 개의 반사경으로, 2026년에는 일곱 개의 반사경을 모두 활용할 수 있도록 완성된다고 하니 적어도 3년 후까지는 VLT가 세계 최대 광학망원경 위치를 유지할 듯싶다. 그나저나 결국 큰 망원경들은 칠레에 모인다...... 기승전 칠레 짱. (출처 : 네이버 지식 백과)


VLT가 있는 곳은 칠레 파라날 천문대였다. 칠레 제2의 도시 안토파가스타에서 남쪽으로 약 120km 떨어진 파라날 산(2,635M)에 위치해 있다. 처음에는 근처라도 가볼 요량으로 일단 C에게 파라날 천문대에 대해 알아보라고 했는데, 그가 뜻밖의 수확을 건져왔다. 파라날 천문대에서 VLT 견학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것이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시작하는 이 견학 프로그램은 참가비가 무료다! 오예!


모든 일정은 이 견학 참가를 중심으로 짜였다. 그전에 무얼 하든 어디에 갔든, 3월 19일 토요일 오후 2시에는 파라날 천문대에 있어야 한다. 그렇게 여행 초반은 대륙의 남쪽 끝 푼타 아레나스를 포함한 파타고니아 지방 여행으로, 여행 후반은 아타카마 사막 지대 여행으로 일정이 채워졌다. (덕분에 보름달이 가까워질 때 은하수를 보게 된 참사가...)


사실 아타카마 사막은 그 범위가 매우 넓어서, 파라날 천문대도 아타카마 사막에 있고, 도시 안토파가스타도 아타카마 사막에 있고, 실제 사막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달의 계곡, 간헐천 등으로 유명한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도 아타카마 사막에 있다. 다만 이 사막은 우리가 흔히 아는 모래사막이 아니다. 단단한 지대이며, 먼 옛날 바닷속에 있다 지각변동으로 올라와 소금을 머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 동네를 다닐수록 참 신기한 광경이 펼쳐진다. 보이는 땅은 건조한 흙빛이요, 보이는 하늘은 파랗다 못해 검푸르다. 세상을 구성하는 색이 딱 두 종류만 있는 것처럼 자연 풍경이 보인다.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에서는 '달'의 느낌을 받았다. 애초에 달과 지형이 유사하다고 일컬어지는 '달의 계곡'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동네 자체도 지형이 급격히 바뀌며 다양하다. 하지만 남쪽으로 내려와 파라날 천문대로 가는 길의 아타카마 사막은 '화성'의 느낌이다. 파아란 하늘을 노란빛으로 바꾸면 굴곡 없는 대지의 화성을 보는 것처럼 참 너르다. 평평한 흙빛 대지 위에 커다란 돌들만 덩그러니 얹어져 있는 게 참 이질적이다. 새벽에 아타카마에서 은하수를 보고 아침에 그곳을 출발하여, 점심 즈음 파라날 천문대에 도착할 때까지 우주여행을 한 느낌이었다. 비슷한 사막 동네인데도(서울-부산보다 더 먼 거리 이긴 하다) 비슷한 듯 다른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파라날 천문대가 있는 지역의 하늘이 아타카마보다 더 건조하고 더 새파래서 밤에 은하수가 더 잘 보일 것 같았다.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 지형. 땅이 정말 굴곡지다.  ⓒ과거 사진첩
파라날 천문대 가는 길의 지형. 너른 땅이 이어지는 느낌. ⓒ과거 사진첩



허허벌판과 같은 곳에서 가끔 나오는 이정표를 따라 방향을 꺾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올라갈수록 하늘이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새파란 하늘을 본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천문대에 가는 동안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저 산 꼭대기에 우리 신혼여행의 목적지가 있다. 커다란 망원경 4기가 멀리서 보이는 순간, 우리는 비명을 질렀다. 



멀리 산꼭대기에 보이는 천문대. 허허 산판(?) ⓒ과거 사진첩



견학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략 30명 정도, 투어는 스페인어와 영어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영어팀은 약 10~12명 정도 된 것 같았다. 대부분이 커플(부부)이었으며 은근 어르신들도 많았다. 주로 유럽인들이었고, 동양인은 우리가 유일했다. 산 꼭대기에 도착해서 입구로 들어가면 명단을 체크하고 안전모를 착용한 뒤, 가이드를 따라 견학을 시작한다. 제일 중요한 곳은 주경 8.2M 망원경이 있는 돔 안. 그곳에 아주 거대한 망원경이 있는데, 모르고 보면 이게 망원경인지 단순히 큰 기계인지 알 수 없다. 아주 복잡한 구조 속에서 자세히 보아야 아 중간에 저게 거울이구나, 위에 반사하는 반사경이 있구나 할 뿐이다. 어쩌면 아는 만큼 보일 것이다.


왼쪽 사진 아래 반사판 같아 보이는 것이 지름 8.2M의 거울. 망원경이 거대 기계 같다. ⓒ과거 사진첩


그곳에서 사진과 영상 등을 찍는 것은 매우 자유로웠다. 설명도 굉장히 자세하게 해주는 것 같았으나 사실 우리 둘 다 영어를 그다지 잘하는 편은 아니라, 내용은 한 귀로 들어와서 한 귀로 흘러갔다. 견학생들끼리 서로 기념사진 남기도록 찍어주기도 하는 등 투어는 여유롭게 진행되었다. 주 망원경 1층 및 2층을 둘러본 뒤, 해당 망원경을 컨트롤하는 사무실에 가서도 설명을 들었다. C는 천문우주학 전공인데, 그가 그대로 전공을 살려서 계속 공부했다면 이 책상에 앉아 모니터에 보이는 내용들을 분석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하였다. 어떤 인생이 더 좋았을지는 모르겠다. 연구는 그가 가지 않은 길이고, 지금은 우리가 함께 이곳에 놀러 온 길을 걷고 있으니. 적어도 가지 않은 길이 아쉽지 않도록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문대의 연구는 열려있고, 세계적으로 연구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 그들이 묵는 숙소는 고급 호텔처럼 좋아 보였다. 마지막으로 그곳도 한 바퀴 둘러보았는데, 시설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살짝 부러웠다. 하지만 여기는 주변이 사막인 허허벌판 산꼭대기일 뿐이고, 이 곳이 아무리 잘되어 있어도 결국 연구실-숙소-연구실-숙소의 일상일 거라고 하면서 C는 나의 부러움을 깨 주었다.


좌) 사무실내부  / 우) 호텔(숙소)내부 ⓒ과거 사진첩


투어는 두 시간가량 걸렸다. 이동마다 넉넉하게 시간을 줘서 충분히 그 공간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 날, '오늘의 덕후는 나야 나'를 뽐내기 위해 프러포즈 때 C가 제작해서 선물한 커플티를 입고 갔다. C는 조금 부끄러워했지만 주 망원경을 관람하고 나온 뒤에,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망원경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랬더니 옆에 어떤 부부가 와서 말을 걸었다. 



너네는 달이니? 우리는 태양이야!


하면서 본인들이 입은 셔츠의 등을 가리켰다. 오잉? 처음에는 그냥 단체에서 온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부부가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에서 사설 천문대를 운영하고 있고, 그곳에서 맞춘 티셔츠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달과 태양이 함께 사진을 찍으면 재미있겠다며 나란히 섰다. 그렇게 산 꼭대기 위해서 거대한 망원경을 앞에 두고, 한국에서 온 부부와 유럽에서 온 부부가 나란히 서서 등 사진을 찍었다. 우하하. 찍는 사람도 몹시 즐거워했던 그런 광경이었다. 그 시간에 함께 투어 하던 사람들 모두 서서 그 순간을 지켜봤다. 우리는 그 부부의 메일 주소를 물었고, 나중에 그 사진을 전달해주었다. 


돔 하나에 직경 8.2M의 망원경 하나씩. 해와 달 부부 덕후 인증숏 ⓒ과거 사진첩


VLT 견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다. 사실 망원경이 얼마나 큰지, 그 망원경으로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어떻게 운영되는지 이런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전 세계에서 모인 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연히 그 순간에 함께했고, 그 순간을 즐겼고, 그곳이 VLT가 있는 파라날 천문대였다는 게 중요했다. 견학생들끼리 서로 대화를 한 건 아니었지만 망원경을 보고 빛나던 눈, 신나게 사진 찍는 모습만 봐도 같은 공감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왠지 모를 뭉클함이 마음에 남았다. 정말 오길 잘한 것 같다. 


투어가 끝나고 산에서 내려오는 길, C는 부끄러운지 더운지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나는 숙소에 들어갈 때까지 하루 종일 그 티셔츠를 입었다.) 그리고 우리는 자꾸 뒤를 돌아봤다. 순식간에 끝나버린 투어가 아쉬운 건지, 아니면 이 일정을 마지막으로 끝나버릴 신혼여행이 아쉬운 건지 모르겠다. 이제 안토파가스타로 돌아가서 마지막 밤을 보내면, 다음 날 산티아고로 이동한 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것이다. 매일 짐을 싸고 숙소를 옮기고 비행기를 타고 운전을 하는 극한의 신혼여행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온전히 둘 만의 시간을 보냈고, 앞으로 미래를 위한 청사진도 같이 그렸다. 지금도 생각할수록 그리운 그런 시간이었다. 


태평양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이제 저기로 넘어간 해는 한국에서 뜰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 한국에서 다음 해를 맞이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10주년이든 언제든 꼭 다시 칠레에, 남미에 오겠노라고. 이왕이면 아이까지 같이 와서, 같은 장소에서 신혼여행과는 또 다른 느낌을 겪어보면 좋을 것 같다는 꿈을 꾸면서, 우리는 그 꿈을 간직하고 현실로 돌아왔다.     



이 해는 한국에서 뜰 것이다. ⓒ과거 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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