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헬렌스 화산과 은하수
우리에게 없었던 역대급 여유로운 여행이었다. 시애틀에서 3일 동안은. 일식을 준비한 것 외에는 거의 여행을 미리 준비한 게 없어 시애틀에서는 그때그때 흥미가 당기는 것을 즐기고 다녔다. 준비한 게 없으니 여유로웠던 일상. 하지만 우리는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 앞에 남겨질 이틀이 어떤 일정 일지 가늠하지 못하였다.
8월 20일. 개기일식 전 날. 오전에 시애틀에서 렌트를 하고 도시를 빠져나왔다. 세일럼까지 바로 갈 생각은 없었다. 미국의 멋진 자연경관을 즐기면서 갈 예정이었다. 낮에는 뷰를 감상하고, 밤에는 별을 본다. 세일럼에는 밤늦게 도착하여 차박을 하고 아침 댓바람부터 세일럼 주 청사 앞 뜰에 돗자리를 펴고 일식을 본다. 이것이 최종 계획이었다.
시애틀에서 세일럼 가는 길에는 국립공원, 국유림 등이 많았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먼저 레이니어 국립공원에 갔다. 외국인들이 설악산 국립공원에 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정말 낯선 곳에 발을 디딘 느낌이었다. 맑은 하늘, 푸른 나무, 만년설의 산 꼭대기, 발 밑에는 야생화, 좋은 공기. 더할 나위 없었다. 시애틀에서 미리 싸간 서브웨이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었다.
지도에서는 바로 옆이었지만 시애틀에서 레이니어 까지 가는데, 레이니어에서 존스턴 리지 천문대까지 가는데 각각 2~3시간이 걸렸다. 정말 땅덩이가 넓은 미국 답다. 생각보다 이동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마음은 여유로웠다. 어차피 체크인해야 할 숙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오늘 밤 안에 세일럼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니까. 중간중간 구글맵을 보며 도로가 막히는지 상황 확인만 열심히 할 뿐이었다.
오후 5~6시쯤 다음 목적지인 존스턴 리지 천문대에 도착했다. 천문대의 시설을 관광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국제적인 관광지도 아니고, 유명하지 않은 곳에 우리가 온 이유는... 별을 보고, 세인트 헬렌스 화산 분화구를 배경으로 은하수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별 보러 굽이 굽이 산 길 따라온 것이다.
C는 가고 싶은 곳을 구글맵으로 찾는다. 위성지도를 펼쳐 놓고, 아니 화면에 띄워 놓고 주변 도시, 산맥, 트인 곳, 고도, 위치 등을 감안해서, 적당한 높이에서 하늘을 편히 관측할 수 있겠구나 하는 곳을 찾는다. 시애틀에서 세일럼까지 가는 길에 있는 숲과 산을 위성 지도로 보면서, 어디까지 도로가 뚫렸는지, 그 도로의 끝에서는 뭐가 보이는지 로드뷰로 본다. 그리고 광해 지도를 띄워 그곳에서 보일 광해가 어느 정도인지 예상한다. 이런 식의 구글 맵 - 확대 - 로드뷰 - 축소 - 이동의 작업을 반복한다. 본인의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할 때까지.
체력이 약한 나를 위해 최대한 차로 편하게 접근 가능한 곳 위주로, 최대한 높고, 주변이 트인 곳을 찾았다. 도시에서 꽤나 떨어진 곳이기에 광해가 거의 없을 거라 예상하지만, 혹시 모르니 그 광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찾아보았다. 시애틀에서 몇 시간 떨어진 곳일 뿐인데, 남한 땅의 어느 곳보다도 광해가 없다.
※ 아래는 위 이미지에 참고한 광해 지도 사이트이다. 위성 촬영 값은 아니기 때문에 대략 참고용으로 활용하면 좋다. 더 자세하고 상세한 광해 지도는 구글링 탐색 고고
참고 : C의 블로그 : https://blog.naver.com/amadas72/221084609804
정말이지 미국의 넓은 땅은 복 받았다 싶다. 도시에서 크게 멀리 가지 않아도 이런 관측환경을 접할 수 있다니. 우리는 신나게 즐기기로 했다. 텅 빈 주차장에 차를 댔다. 천문대 방향으로 걸어가면 그 너머에 산책로가 쭉 이어진다. 왠지 이 산책로를 넘어 저 용암이 흘러내린 흔적이 보이는 곳까지 가고 싶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가늠할 수 없기에 그냥 이 자리에서 즐기기로 하였다.
아주 쾌적한 관측이었다.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중간중간 벤치가 있어 쉬기 좋았고, 여름밤 춥지도 않았고, 건조한 곳이라 모기도 없었다. 오후 7시쯤 개와 늑대의 시간과 같은 붉은 여명이 온 산을 비추며 세상을 노란빛으로 물들이는데 그 풍경이 환상적이었다. 우리는 쉼 없이 셔터를 눌렀다. 8시쯤 이미 머리 위는 깜깜하고 저 하늘 너머에는 북두칠성이 보이는데, 지평선 근처에는 아직 해의 붉은 기운이 남아있었다. 정말 높은 곳에서, 맑은 날에 경험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본격적으로 관측을 시작했다. 망원경이 없기에 딥스카이를 보지는 못하고, 맨 눈으로 전체 하늘을 보는 관측 위주로 보았다. 나는 온 하늘과 자연을 한 번에 느끼는 안시 관측이 좋다. C는 옆에서 화산을 배경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고, 나는 누워서 하늘을 구경했다. 나는 항상 이렇게 하늘을 볼 때마다 별똥별을 몇 개나 봤는지 세곤 한다. 언제나 소원은 1번! 하고 빌지만, 1번에 해당하는 내용은 종종 바뀐다.
1~2시간에 5개 정도, 보통 하늘을 계속 보고 있으면 발견하는 별똥별의 개수이다. 많이 보면 시간당 10개 가까이, 적게 보면 한 시간에 두어 개 정도. 유성우 극대기를 제외하고, 평소의 관측 경험으로는 이 정도이다. 오늘은 별똥별보다 인공위성을 아주 많이 보았다.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지 10분여 만에 인공위성만 10개 넘게 보았다. 까만 밤하늘에 별 비스무리한 밝기로 어떤 게 움직이는데, 떨어지는 느낌이나 더 밝아지거나 하는 느낌 없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면 그게 바로 인공위성이다. 휙- 하고 빠르게 사라지는 별똥별과 깜빡이며 지나가는 비행기와 다르다.
서울 하늘은 워낙 밝기 때문에 정말 밝은 주요한 별만 보이고, 인공위성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두운 곳으로 오니 별도 많이 보이고 그만큼 인공위성도 많이 보였다. 아마 일주 사진을 찍으면 별의 궤적을 무차별하게 가로지르는 선들이 많이 보일 것이다. 어쩌면 이제 하늘에 더 이상 별만 있는 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이렇게 인공위성이 우리 머리 위에 가득해졌지...
2019년부터 전 지구에 인터넷을 보급하기 위해 소형 인공위성을 띄우고 있다는 스타링크 프로젝트를 보면, 인간은 스스로의 기술에 시야를 가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소외된 지역을 위한 인터넷 보급도 중요하겠지만, 어쩌면 앞으로는 순수한 별이 있는 하늘을 보는 것 또한 어떤 특권 계층에게만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지구에 있는 우리 같은 일반인은 불가능한... 기술이 발전할수록 어려운 문제다.
여름 은하수의 중심부는 남쪽에 있고, 천문대 산책로에서 세인트 헬렌스 화산 분화구도 남쪽에 있다. C는 사전에 이를 확인하고 분화구를 배경으로 은하수 사진을 찍기 좋겠다는 기대로 이곳에 왔다. 그리고 기대대로 어두워질수록 분화구 주변에 은하수 중심부가 점점 선명해지는 것이 보였다. 나이스. 이대로 찍으면 멋진 사진을 건질 수 있을 거야 하는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는데,
온 하늘이 뻥뻥 뚫려 있는데, 하필 은하수 중심부인 궁수자리 쪽에 옅은 구름이 낀 것이다. 그런데 그 구름, 심상치 않다. 엄청 밝아서 주변의 시상을 다 해치고 있다. 이 곳의 남남서 방향에 포틀랜드가 있어 그 도시 광해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구름이 없었다면 먼 도시의 광해는 큰 영향이 없을 테지만, 구름이 그 빛을 모두 반사하고 있어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이고. 이렇게 멋진 곳에서 왜 하필 저기가 구름이니. 딱 저기까지 어두웠으면 오늘의 관측은 아주 환상적일 것이다. 내일이 개기일식이니 달은 지금 그믐 상태라 밤새 뜨지 않을 것이고, 여기는 남한 땅 그 어디보다 어두운 곳이니 광해도 없다. 하늘은 맑고 건조하여 구름도 없고, 별빛도 또렷한데 왜 하필 딱 은하수 중심부만!
하는 수 없이 은하수의 다른 부분과 머리 위의 밤하늘을 찍으면서도 C는 계속 아쉬워했다. 새로 산 필터도 껴보고, 렌즈도 바꿔서 사진을 찍어보고 요리조리 다양하게 사진을 찍었지만, 처음 기대했던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게 몹시 안타까웠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러다가 문득, C는 나에게 카메라 속 구름이 밝게 빛나는 위치에 가서 있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이내 본인도 내 옆에 왔다.
짜잔. 밝은 부분을 이용하여 실루엣 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게 또 이렇게 사진이 되네...
비록 은하수 중심부의 멋진 풍경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화산과 은하수를 배경으로 우리 모습을 담은 멋진 셀카를 남겼다. 그리고 이 사진은 두고두고 우리의 베스트 컷으로 활용되었다. 어쩌면 이런 사진을 남기라는 전화위복의 구름일지도 모른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해보며, 그 날 우리는 고요한 밤하늘을 즐겼다.
어느덧 자정이 되었다. 아니 해 지고 나서 잠깐 구경하고 내려가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시간이 이렇게 된 거죠. 관측 환경이 정말 좋다 보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5~6시쯤 온 것 같은데, 일몰과 은하수와 별을 감상하고 나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그러고 보니 저녁도 딱히 먹은 게 없다;;) 그냥 사진 찍고 벤치에 누워서 별을 봤을 뿐인데. 세일럼까지 가려면 빨리 가도 3시간은 걸리는데,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웠다.
어쨌든 핵심은 내일 오전에 있을 개기일식이다. 그렇기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이동하기로 하였다.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기에 아마 도착하면 꽤나 피곤할 것이다. 이미 흘러간 시간을 뒤로하고 우리는 부랴부랴 이동했다. 새벽의 고속도로는 고요했고, 내일 개기일식을 알리는 전광판만 부지런히 빛나고 있었다. 두근두근. 아침에 떠오를 해를 기대하며 우리는 세일럼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