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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리 Nov 01. 2020

차원이 다른 경험, 개기일식을 보다

세일럼 주 청사 근처 공영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이곳은 축제판이었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별덕후다'를 뽐내는 위용을 가진 사람들이 동네를 돌아다녔다. 어떤 사람은 그 주차장에 아예 살림을 차린 것 같기도 했다. 


우리는 그 새벽, 세일럼 주 청사 앞 공원의 공용 화장실에 들어가, 천장 유리 위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며 나름 하루의 피로를 씻었다. 대충 세수하고, 양치하고 할 건 다했다. 그리고 차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며 차박 준비를 하였다. 지금부터 자면 세 시간은 잘 수 있을 것 같다. 


이 공간이 오늘 밤 우리의 숙소다. ⓒ과거 사진첩


막상 누우니 잠이 오지 않았다. 사실 미국 한복판이라 무서운 것도 좀 있었지만, 괜히 깊게 잠들었다가 일식을 놓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몸은 엄청 피곤한데, 정신은 말똥 했다. 게다가 접은 뒷좌석은 아주 커다란 판때기나 다름없어서 옆에서 C가 뒤척이면 내 몸이 흔들리고, 내가 뒤척이면 C가 둥둥 뜨는 그런 상태였다. 거의 고정된 자세로 균형을 유지해야 그나마 누워있을 수 있달까. 그래도 180cm 가까이 되는 C가 다리를 뻗고 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 차박은 나름 훌륭했다고 평할 수 있다. 


두어 시간쯤 선잠을 잔 것 같다. 동이 터오는 시점에 바깥이 소란스러워서 깼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일찌감치 주청사 앞 잔디밭에 자리를 잡자하여 길을 나섰다. 


아침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C는 자고로 일식은 사람 많은 데서 환호성을 지르며 보는 재미가 있어야지 하며, 일부러 이런 공터를 찾아서 왔는데, 그 생각이 적중했다. 심지어 일식이 시작되는 순간 지구 멸망 감성인듯한 북소리가 둥둥둥 울려 퍼지고, 이것저것 간단한 행사도 진행하는 것 같았다. 


어느덧 잔디 밭은 꽉 찼다. 이 많은 사람들은 어디서 온 걸까. 모두 개기일식을 본다는 하나의 목적을 갖고 여기에 모여들어 그런가 분위기는 아주 신나 있었다. 정말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 신선한 공기. 우리가 여기까지 오다니. 개기일식을 맞이하는 순간에 우리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게 매우 감격스러웠다.


빈틈 없이 꽉찬 잔디밭. 이곳에서 이 많은 사람들이 한 곳을 바라보았다. ⓒ과거 사진첩
이 순간을 함께할 우리의 장비들 ⓒ과거 사진첩


9시 5분, 부분일식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태양이 80% 이상 가려진대도 아마 대부분은 그 차이를 잘 못 느낄 것이다. 여전히 태양은 맨 눈으로 볼 수 없고, 밝게 빛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분일식이 진행되는 동안은 다들 차분하게 더더더 태양이 가려지는 순간을 기다렸다.


어느덧 달이 태양을 거의 다 가리는 순간. 왠지 모를 서늘함도 느껴지고, 하늘도 심상치 않은 그때는 정말 실시간으로 달이 태양을 다 가리러 가고 있구나 하는 게 보인다. 간다. 간다. 간다. 심장이 두근두근. 태양이 완벽하게 가려지기 전까지 카메라에서 태양 필터를 뺄 수 없다. 그렇기에 아주 가느다란 흔적만 남는 사진이 찍힌다. 


오른쪽 위부터 점점 달이 들어온다. 부분 일식에서 개기일식으로 가는 과정 ⓒ과거 사진첩


그러던 순간. 달이 완벽하게 태양을 가렸다. 이전에 기대감을 담은 함성 소리와는 수준이 다른 비명을 모두 지른다. 나도 환호성을 질렀다. 이건 다르다. 달이 99%를 가리는 순간과 100%를 가리는 순간은 정말 완벽하게 다르다. 태양에서 눈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 위는 어두웠고 360도의 지평선이 모두 노을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개기일식. 이때부터는 필터를 빼고, 선글라스를 벗고 온전히 눈으로 태양을 봐도 된다.
코로나와 홍염이 보인다.
코로나는 하얗게 보이는 밝은 빛이고, 홍염은 오른쪽 위, 1시 방향에 보이는 것과 같은 붉은색 빛이다. 저래 뵈어도 홍염의 크기가 지구의 몇 배나 된다. 


태양 표면 밖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코로나가 맨 눈으로 보였다. 코로나가 아주 크게 휘몰아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빠르게 만개하는 꽃잎을 보는 것 같았다. C는 태양 필터를 빼고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고, 나는 감상했다.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2분여의 시간 중, 중간에 뒤를 돌아 개기일식을 배경으로 한 우리 둘의 사진을 남겼다. 이 순간은 소중하니까! 그리고 이 모든 절정의 순간을 액션캠으로 찍었다. 그 당시 내가 코로나를 표현한 몸짓들, 셀카를 찍는 동안 C의 급박한 목소리 등등 모든 것이 4분여의 영상에 담겼다. 


이보다 더 짜릿한 경험이 있을까. 2분 남짓의 짧은 시간만 볼 수 있기에 더욱 강렬하다. 오로라도 은하수도 모든 것을 뛰어넘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개기일식을 보러 올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의 경험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경험을 했다. 달이 완벽하게 태양을 가리는 순간 온몸에 느껴지는 전율은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알지 못할 것이다. 아마 이러한 자극을 또 경험하고 싶어서 개기일식을 좇아 세계를 누비는 사람들이 있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다른 경험으로 대체할 수 없는 새로운 자극이었다. 그들이 무슨 마음으로 개기일식이 보이는 곳이면 오지를 마다하지 않고 가는지 알 것 같았다. 지구가 아니라 우주 한 복판에 내가 놓여 있는 이 기분. 온 우주의 변화를 몸으로 직접 느끼고 있는 이 기분은 정말 다른 차원에 갔다 온 것 같은 경험이었다. 


개기일식의 절정을 한 장으로 남기면. ⓒ과거 사진첩


일식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의 셀카. 점점 어두워지다가, 마지막에 태양 속 점은 달이 들어간 모습이다. ⓒ과거 사진첩


개기일식의 순간이 지나고, 오른쪽 위부터 다시 태양 빛이 나오기 시작하는 순간.
태양빛의 일부만 보이는 모습이 다이아몬드 반지 같다고 하여 '다이아몬드 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완벽한 2분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태양 빛이 빼꼼하고 고개를 내밀었다. 제일 먼저 가려진 곳부터 다시 나타났다. 세상은 다시 밝아졌고, 절정의 순간은 지나갔다. 모두 한마음 한 뜻으로 박수를 쳤다. 내가 지금 뭘 본 걸까, 이런 경험을 하게 해 준 자연에 감사하며, 여기까지 와서 이 경험을 한 우리 모두의 열정에 감사하며. 모두의 인생에 강렬하게 남을 그 순간을 즐겼다. 달이 빠져나가는 부분일식이 완전히 끝나기까지 두 시간 가까이가 더 걸렸다. 우리는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모든 일식의 과정을 다 보고 돌아가기로 했다. 이제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남은 시간을 보냈다.


모든 체력을 소진했다. 아직 오늘은 12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우리를 미국까지 오게 한 모든 원동력을 다 썼다. 열정의 크기만큼 뿌듯함이 마음에 남았다. 이걸 보러 오자고 했던 나 자신을 무척 칭찬했다. 이제 무사히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의 함정은 여기에 있었다.


사실 일식을 보러 가는 과정을 걱정했다. 많은 차들이 몰려서 차가 막히면 어쩌나, 주차할 곳이 없으면 어쩌나 등. 그러나 의외로 오는 동안은 아주 수월했다. 도로도 여유롭고, 주차도 편했다. 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은, 일식을 보러 오는 건 사람마다 출발 날짜가 다를 수 있지만, 끝나는 건 모두 다 같이 동시에 끝난다는 것이다. 그렇다. 부분일식이 끝나는 순간까지 보고, 세일럼 주청사에서 기념품도 사고, 조금은 뒤늦게 출발하니까 괜찮겠지 생각했던 것은 모두 착각이었다.


세일럼뿐만 아니라 미국 서부 곳곳에 위치했던 관람객들이 일식이 끝나고 동시에 돌아가면서 하나밖에 없는 고속도로는 그야말로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세상에 있는 캠핑카는 그날 다 본 것 같았다. 어디에 그 많은 차들이 있었는지, 미국 고속도로가 막힌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는데 그 중간에 우리가 있었다. 


세일럼에서 포틀랜드까지는 1시간 반 ~ 2시간 정도의 거리이기에, 단순히 포틀랜드에 가서 점심을 먹자고 생각했다. 톨게이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고속도로로 나가서 쭉 가면 되는 길이니까. 그러고선 출발을 했는데 아뿔싸. 세일럼뿐만 아니라 사방 곳곳에 퍼졌던 차들이 모두 고속도로로 몰렸다. 포틀랜드까지 가는데 2시간은커녕 7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구글 내비가 고속도로 말고 30분 빠른 길이라며 국도(?)를 안내해줬는데, 모두 그 길로 들어섰는지 그 국도(사실 거의 오솔길 수준)는 이내 주차장이 되고 말았다. 나중에 내비를 다시 보니, 결국 그 국도의 끝은 다시 고속도로로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내비에서 10분이라는 그 길을 다시 빠져나오기 위해 우리는 2~3시간을 그곳에서 있었다. 덕분에 진짜 오랜만에, 밀리는 도로를 보며 차에서 나와서 스트레칭도 해보고, 얼마나 밀리나 사진도 찍어보고 그랬다. 한국이었으면 이런 곳에 뻥튀기나 음료수 파는 분들이 있을 텐데 하는 추억이 생각났지만, 미국 벌판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앞 뒤로 빽빽하게 밀려있다. 화장실도 못가고... 정말 총체적 난국이었다. ⓒ과거 사진첩


어차피 고속도로로 가게 될 거 괜히 돌아서 가는 바람에 시간만 더 쓰고, 포틀랜드에 도착하니 저녁 7시. 우리는 점심을 그곳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결국 저녁을 먹게 되었다. 전 날 저녁부터 하루 종일 거의 굶고 (그나마 차박 한다고 비상식량을 차에 사뒀었는데, 그마저도 초코바 같은 거라 많이 먹지를 못해 극도의 허기만 채웠더랬다.), 화장실을 못 가니 물도 잘 마시지 못하고, 잠도 거의 못 잔 상태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도착한 식당. '밥'을 먹고자 일식당을 찾아 초밥, 덮밥을 먹었는데 세상에 얼마나 꿀맛인지. 


본능적인 허기를 채우고 있는데, 야외 테이블에 앉은 내 등 뒤로 어느덧 오늘의 해가 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불과 오늘 아침에 태양이 완전히 가려지는 개기 일식이 있었는데, 그 태양이 지려고 하다니. 왠지 모를 시간 무상과 우리가 오늘 아침에 경험한 건 찰나의 꿈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오늘이 가고 있구나. 


8시쯤, 다시 포틀랜드에서 시애틀로 가는 길. 배도 부르겠다 이제는 졸림이 우리를 덮쳤다. 일자로 뻗은 길은 끝이 없는데, 아직도 거북이걸음이다. 이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 집으로 가는 걸까. 우리처럼 먼 길 온 사람들도 많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바로 시애틀로 돌아오지 말고, 그곳에서 하루라도 더 자고 시애틀로 돌아오는 일정을 짰어야 했다는 깨달음이 들었다. 이런 바보 같은. 여행 계획을 짤 때, 일식을 중간에 넣었어야 하는데 후반부에 넣어버리는 바람에 이렇게 마지막에 생고생 중이다. 다음날 아침에 시애틀 공항에 가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이 고생을 하며 밤새 운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 팝송이나 틀어 놓고 제목 맞히기, 응원가 따라 부르기 등 잠을 깨기 위해 온갖 발악을 해가며 새벽 2시쯤 시애틀 숙소에 도착했다. 



다음 날 아침, 공항에 도착하니 눈에 보이는 곳마다 개기일식 사진이 메인에 걸려 있다. 가판을 가득 채운 신문들의 1면이 모두 개기일식이다. 와, 우리가 이걸 봤어! 이걸 봤다고! 


시애틀 공항 가판대 신문 1면은 모두 개기일식! ⓒ과거 사진첩


한국에 돌아오니 우리의 개기일식 경험을 담은 기사가 나름 주변에 화제가 되어있었다. 국도 같은 오솔길에 갇혀있을 당시, 카톡방에서도 방금 있었던 일식으로 난리였다. 그때, 우리도 여기저기에 자랑하고, 방금 우리가 찍은 사진을 올리고 그랬었는데, 단체방 중 하나에 있었던 기자인 지인이 방금 경험한 우리의 생생한 이야기를 기사로 쓰면 좋을 것 같다고 한 것이다. 차 안에서 그 지인과 카톡으로 주고받았던 내용이 금방 기사로 정리되어 나왔고, 여기저기 업로드가 되었다. 덕분에 우리의 살아 있는 후기가 기사로 남게 되었고,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하나 더 하게 되었다. 비행기 타고 오느라 몰랐는데, 만약에 실명을 공개했더라면 지면에도 실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걸 뒤늦게 보는 바람에 기회는 놓쳤지만.. 그래도 이런 특별한 경험이 온라인 기사로 나오게 되어 영광이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남미에서 개기일식, 괌-싱가포르 같은 적도 부근에서의 금환일식 등 몇 번의 일식 기회가 있었지만, 이사 일정과 겹치거나 코로나 등의 사정으로 가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꼭 일식을 또 보러 어딘가로 갈 것이다. 이 한 번의 강렬한 경험은 두 번을 찾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리고 그 한 번도 가슴속 깊이 새겨져 그 찰나를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한다.


개기일식 당시 우리를 촬영한 액션캠. 우리는 영상 오른쪽에 있다.
4분여 동안 개기일식 전/후의 현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변화하는 순간마다 외치는 비명소리를 위해 별도의 편집을 하지 않아, 우리의 엉뚱한 모습들도 모두 담겨있다. 30초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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