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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리 Nov 01. 2020

알프스 산 위로 떠오르는 달, 월출과 그림자

돌로미티에서 별똥별과 함께

별을 보기 위해 우리는 본능적으로 높고, 어두운 곳으로 간다. 아무래도 높은 곳은 도시의 불빛과 대기의 영향을 덜 받고, 어두워야 밤하늘의 별빛이 잘 보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천문대가 산 위에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가, 우리는 어느새 산을 즐겨 찾는 부부가 되어 있었다. 등산이 취미는 아니지만, 산을 즐긴다고 해야 할까.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귄 곳도 영남 알프스, 신불산에서였다.  


'18년 추석 다음날, 우리는 3박 5일 일정으로 이탈리아 돌로미티로 여행을 갔다. 명절 성수기 여행 일정에 약간 엇비켜서 정말 딱, 돌로미티만 여행하고 오기 위한 일정이었다. 베네치아로 이탈리아 입국, 그곳에서 렌트하여 3시간여 거리의 이탈리아 북부 돌로미티 지방을 돌아다녔다. 급하게 준비한 여행이다 보니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핵심은 우리가 그 알프스 산맥 한가운데를 수동 경차로, 평균 시속 30km/h로 다녀왔다는 사실이다. 산을 올라가야 하는데 속도는 안 나고 RPM은 올라가고, 뒤에 있는 아우디는 유유히 우리를 추월하고, 그 어떤 차도 클락션을 울리지 않았던 그 현실이란.  


티코를 제외하고, 타 본 차 중에 제일 작았다. 알프스 산 꼭대기에서 좌 사륜구동 우 아우디를 두고 사이에 주차된 모습이 처량해서 한 컷. ⓒ과거 사진첩


거의 렌트 사기였지만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그 차를 타고 알프스 산맥을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정말 눈물겨웠다. 그래도 사고 없이 무사히 돌아온 것에 감사를.


여행하는 동안 날씨는 정말 환상적이었고, 우리는 행복했다. 그리고 여행 마지막 날 밤, 그동안 구경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장소들 중, 별 보며 사진 찍기 좋은 곳을 골라 다시 그곳을 찾았다. 아무렴 우리 여행에서 별 보기가 빠질 쏘냐. 그곳을 다시 찾은 이유는, 높은 곳에서 구불구불한 산 길의 차량 궤적과 함께 별의 일주 사진을 찍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근에서 길이 험난하기로 유명한 코스였다. 


구글 지도 캡처. 꼬불꼬불한 정도가 장난이 아니다. 이 길을... 저 차를 타고 다녔다.
좌) 지도의 오른쪽(동쪽) 방향 길 / 중) 지도의 왼쪽 방향(서쪽) 길 / 우) 언덕 위에서 바라본 주차장


주차장에 차를 대고 살짝 언덕을 올라오면 주변이 뻥 뚫린, 그런 곳이었다. 사방에는 삐죽삐죽한 거친 돌산이 멀리서 둘러싸고 있고, 바로 앞의 시야는 양쪽으로 트여 있는 정말 매력적인 자연이다. 마을은 멀리 있고, 아래에 있는 한두 개 건물의 불빛은 그다지 방해되지 않는다. 주변은 산뿐이기에 별이 정말 잘 보일 것 같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저녁을 먹고, 부푼 기대감을 안고 저 구린 수동 경차를 이끌고, 어둠 속에서 구불구불한 길을 30여분을 달려 이곳에 도착했다. 


자,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어 볼까? 하는 찰나. C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 삼각대가 없어.


오랜 시간 노출을 해야 하는 별 사진을 흔들림 없이 찍기 위해서는 삼각대가 필수. 심지어 별의 일주 운동을 담은 일주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2시간여 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응? 삼각대가 없다고? 


기억을 더듬어보니, 숙소 입구에 두고 안 갖고 나온 것 같다고 한다. 하.... 이를 어쩐다. 별이 잘 나오게 사진을 찍으려면, 달이 뜨기 전에 찍어야 한다. 이 사진의 포인트는 구불구불한 길을 오르는 차량 불빛 궤적이라 초반에 빛은 그걸로 충분했다. 최소한 달이 뜨려면 어느 정도 사진을 찍고 나서 떠야 한다. 오늘은 보름이 지나고 3일 후 정도. 달은 오후 8시 반쯤에 뜰 예정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숙소까지는 30분. 왕복이면 1시간. 그런데 달은 앞으로 1시간 후면 뜰 것이다. 


고민이었다. 1시간을 저 구불구불한 길을 운전해서 다녀와 제대로 나올지 알 수 없는 사진을 찍을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이대로 삼각대를 포기할 것인지. 선택은 C가 하도록 하였다. 



그냥 별이나 보자


그는 삼각대를 포기했다. 무엇보다 1시간을 다시 다녀오는 것이, 그리고 그만큼 더 늦어진 밤에 또 그 길을 돌아가야 한다는 게 무서웠다. 정말이지 저 차를 끌고 이 길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건 몹시 부담스러운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굉장히 보수적으로 여행하는 우리에게는 차라리 그냥 찍으려던 사진을 포기하는 게 안전한 선택이었다.


그냥 언덕 위에다 돗자리를 펴고 누웠다. 별이나 봅시다. 까짓 거, 사진 그까짓 거. 


아쉬운 마음에 카메라를 땅에 눕히고 렌즈를 하늘을 향해 둔 뒤에 사진을 몇 컷 찍긴 했다. 남쪽 은하수 방향으로 몇 컷, 북쪽에 북두칠성이 나오게 몇 컷. 남긴 사진은 이 정도?


남쪽 방향으로 은하수. 땅에 붙어 사진 찍었다는 게 느껴지는 배경들이다. ⓒ과거 사진첩
반대편 북쪽 방향. 돌산 위로 살포시 떠오른 북두칠성. ⓒ과거 사진첩


그러고서는 오랜만에 둘이 나란히 누워 눈으로 별을 봤다. 그동안 C는 사진을 주로 찍느라 온전히 별을 눈으로 즐기는 기회가 적었는데, 오늘은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즐기자 싶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도란도란. 대학생 때, 동아리 활동하면서 돗자리에 누워 다 같이 별을 보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 순간을 즐겼다.


별똥별이 참 많이 떨어졌다. 이 날은,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별똥별을 많이 봤던 날이었다. 1시간 동안 10개 넘게 보았으니.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가 아주 많았고, 그 위로 유유히 지나가는 인공위성도 많이 보였지만, 순식간에 밝게 타오르며 사라지는 별똥별만큼은 가히 예술이었다. 북두칠성 근처로 많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같이 별똥별을 세면서 소원을 빌었다. 수없이 빈 소원들 중에 '알프스 정기를 받은 아이를 갖게 해 주세요'도 있었다. 


그렇게 어두운 하늘을 즐기고 있는데, 어디선가 사방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어두울 때는 잘 몰랐는데, 거친 돌산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하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무서운 것은 어둠 그 자체보다도 빛에 대비되는 어둠일지도 모른다. 어딘가는 밝고, 어딘가는 어두운 것, 그 차이가 주는 두려움.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깨달았다.

아! 달이 떠오르는구나! 


달빛이 이렇게나 밝았구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월출을 온전히 느낀 순간이었다. 그동안 새해 소원을 빈다 어쩐다 하면서 일출 보러는 종종 다녔는데, 이렇게 온전히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월출은 처음 보았다. 특히 달이 떠오르며 주변의 환경이 어떻게 밝기가 달라지는지 느끼는 순간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은 이미 해가 있는 상태에서 떠오르고, 해가 지고 나면 이미 하늘 위에서 밝아지기 때문에 월출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이미 태양이 넘어가 어둠이 내리고 난 후에 달이 떠야 그 월출의 느낌을 정확히 받을 수 있는데, 그건 오로지 보름이 넘어간 후에나 가능하다. 그동안 초승달이나 상현달이 지고 어둠이 내려앉는 모습은 자주 봤었지만, 반대로 달이 떠오르는 순간을 생생히 느낀 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도 않았다. 몇 번의 월출 경험은 있었지만 구름 속에서 떠오르는 모습이라든지, 이미 밝은 도시에서 떠오르는 모습 정도였다.  그다지 인상이 깊지는 않았는데, 이 날의 월출은 신선한 충격이라고 할까. 1월 1일 새해에 떠오르는 태양만큼이나 감격스러운 월출 모습이었다. 


월출과 변화하는 그림자를 담은 타임랩스. 카메라를 바닥에 두고 열심히 찍었다.
영상 속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것들은 모두 비행기다. 별똥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없어 영상 속에 남기가 어렵다.  


우리는 뭔가 새로운 것에 뒤통수를 맞고 눈을 뜬 것처럼, 달빛이 온 세상을 비추는 과정을 바라보았다. 새삼스럽게 깨달은 달빛의 위력은, 머리 위에 있었던 은하수의 존재를 없애버렸다. 어느덧 너무 밝은 달빛에 은하수가 잘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C는 그 순간을 최선을 다해 기록으로 남겼다. 땅에 카메라를 두고, 열심히 각도를 조절해가면서. 마지막에는 달빛에 비친 우리의 그림자까지 한 컷.




처음에 찍고자 한 사진은 못 찍었지만, 전혀 아쉬움이 없었던 별 나들이였다. 우리는 같은 것을 바라보았고 , 많은 별똥별을 보았고, 온 세상을 비추는 월출의 순간을 보았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내 뱃속에서는 우주의 위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고, 3주 후에 나는 임신 소식을 듣게 되었다. 결혼 2년 반 만에 첫 임신이었다. 


그 날 본 수많은 별똥별들이 우리에게 와서 새로운 우주가 된 것 같아, 태명을 별똥이라 지었는데... 찰나를 스치는 별똥별처럼 그로부터 3주 후에 우리 곁을 떠나갔다. 월출을 보며 세상을 새롭게 느낀 것만큼이나,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겪을 줄이야... 이렇게 돌로미티 여행은 우리의 마음속에 평생 잊을 수 없는 새로운 별을 하나 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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