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별의 관계
시애틀 야경의 최고 명소, 케리 파크. 시애틀의 상징인 니들 스페이스와 도시 전경, 그리고 멀리 보이는 레이니어 산과 하늘까지 한 번에 볼 수 있어 소문난 곳이다. 시애틀 야경 사진의 대부분은 이곳에서 찍은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곳에 우리가 왔다. 시애틀에 도착한 첫 날, 첫 번째 코스였다.
언덕 위 주택가 중간에 공터가 있고, 그곳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 누군가는 한쪽 구석에서 자리를 잡고 커다란 삼각대 위에 올려놓은 카메라로 연신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단체로 신나게 떠들면서 V를 그리며 사진을 찍었다.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이 곳에서 자기만의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풍경 속에 우리가 있었다. 별 사진을 찍으러 온 부부. 해질녘부터 3시간여를 그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도시 속 하늘의 변화를 바라보았다.
도시에서 별 사진 찍기. C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였다.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아도, 익숙한 도시의 풍경 너머에는 언제나 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진을 찍는 것이다. 우리는 서울에 살고 있기에 주로 서울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여행와서 새로운 도시 사진을 찍을 생각을 하니 설렜다. 어떤 사진이 나올까.
하늘은 맑았고, 별은 잘 보였다. 나름 대도시지만 서울에 비해서 광해는 적었고, 공기가 맑았기에 대기의 뿌연 느낌이 없어 사진은 잘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어두워지는 하늘과 하나 둘씩 켜지는 도시의 조명을 바라보며,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비행기다. 케리 파크에서 바라보는 하늘을 가로질러 비행기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가끔 한 두대도 아니고, 무지막지하게 많다. 시애틀에는 국제공항을 포함하여 근처에 대략 6개 정도의 공항이 있다. 항로도 다양하고, 이착륙의 방향도 다양하다. 생각해보니 시애틀은 보잉(BOEING)의 도시이다! 아이고, 이를 어쩌나. 별이 나와야 하는데 비행기만 나오는거 아닌가 몰라.
시간이 갈수록 비행기가 점점 많아지고, 그 불빛이 점점 밝아진다. 낮에는 하늘 속 점이었던 비행기가 이제 밤이 되니 빛을 깜빡이며 눈 앞을 질러간다. 지나가는 경로가 사진에 남을 것이다. 그렇게 속절없이 비행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서울에선 이러지 않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서울은 대부분이 비행 제한 구역이다. 그래서 드론도 못날리지만, 일반 비행 경로도 없다. 우리나라의 가장 북쪽에 있는 항로는 서울 보다 남쪽에, 김포공항-인천공항으로 가는 동-서 구간이다. 동-서로 이어지는 길 보다 더 북쪽으로는 비행기가 올 수 없다.(군사용, 재난상황 제외) 그래서 강북에서 비행기를 보면 대부분 서쪽에 있는 공항으로 가는 모습이 보일 뿐이고, 서울 안에서도 신월동 및 강서구 일부만 그 경로 아래 있어 비행기를 볼 수 있다. 심지어 그마저도 김포공항이 밤 11시까지만 운영하기 때문에, 그보다 늦은 밤에는 비행기를 거의 볼 수 없다. (인천공항은 24시간 운영하므로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보일 수는 있다.)
그래서 서울은 하늘이 깨끗하다. 엄청난 대도시라 광해가 심하고, 공기가 안 좋은 날이 많지만, 그래도 이런 인공적인 것들로부터 하늘이 자유롭다. 서울에서는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 거라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런데 시애틀에서 그 하늘을 보고 있자니,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자연적 조건을 잘 갖추고 있지만 하늘을 온전히 누리기가 힘들었다. 별을 보고 느끼기 전에 사방으로 뻗어가는 비행기를 먼저 보게 된다. 좀 더 밝고, 움직이는, 자극적인 것에 시선을 빼앗기는 것이다. 별은 움직이지도 않는 것 같고, 밝기도 변하지 않기에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 같다. 그 변화는 눈에 잘 보이지 않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별이 이동했음을 깨달을 뿐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지만 별과 비행기의 존재감은 확연히 달랐다.
이 영상 속에서 움직이는 빛은 모두 비행기다. 많은 사람들이 별똥별과 착각하지만, 이 정도 광해에서 별똥별은 맨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별은 오른쪽 위로 움직이고 있다. 정말이지 시애틀의 하늘은 어마무시했다.
이 날을 시작으로 밤하늘을 볼 때마다 비행기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광해가 아주 없는 세인트 헬렌스 화산에서도 계속 미국을 가로지르는 비행기의 존재를 느꼈고, 돌로미티의 산골짜기에서도 쉼 없이 이어지는 비행기의 행렬을 보았다. 내가 이렇게 여행을 다닐 수 있는 건 저 비행기를 타고 왔기 때문인건데, 내가 쓰는 물건들도 저렇게 배송되어 온 것일텐데 왜 이렇게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 걸까. 문명의 혜택을 받고,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도 하늘을 볼 때 그 문명이 미운 이 이중잣대는 무엇일까.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뭔가 이렇게 눈을 터놓을 수 있는 하늘이 사라져가는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렇기에 우리는 좀 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봐야 한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 하기에. 요즘 어두워지면 남쪽 하늘에 가장 밝게 빛나고 있는 건 목성이다. 그보다 한뼘쯤 왼쪽 위에 보이는 건 토성이다. 그즈음 동쪽에 누리끼리 혹은 붉게 보이는 건 화성이다. 가을철 별자리는 페가수스 정도만 잘 보이고 나머지는 워낙 어둡기에, 가을에 밤하늘의 별을 즐기기에는 이러한 행성들이 제격이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즐겁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는 하늘이 그렇다. 우리는 도시 속에 살면서 문명에 파묻혀 있지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바로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밝은 서울 하늘 속에서도 존재감을 내뿜는 별들을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런데 시애틀 하늘에서는 그마저도 비행기가 앗아가 버렸다. 여유를 볼 수 없는 뷰. 그게 조금은 아쉬웠다.
위 영상을 이렇게 한 장의 사진으로 남기면.
왼쪽에서 오른쪽, 대략 40도 정도의 사선으로 이어지는 것이 별이고, 나머지는 전.부. 비행기다.
연속된 흔적도, 빨간 불빛도, 띄엄띄엄 있는 점선도, 두 줄로된 모습도 모두 비행기다.
이렇게 일주 사진은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