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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리 Nov 01. 2020

크레이터, 7살의 꿈을 마주하다

열정의 시작

C의 전공은 천문우주학이다. 언뜻 들었을 때, 밥 굶기 딱 좋다고 생각하는, 순수 학문을 지향하는 그런 전공이다. 그렇기에 천문우주학을 전공하는 많은 학생들은 정말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이 과에 진학한다. 소수 인원만 뽑기에 그냥 성적에 맞춰 이 과에 오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전국의 수많은 수험생들 중, 천문학에 열정을 가진 학생들만 뽑아도 이미 차고 넘치기에...


7살, 과학책에서 본 크레이터가 꿈의 시작이었다. 애리조나 주에 있는 운석의 흔적, 지름 약 1.2km짜리의 크레이터 사진을 본 그 꼬마는 별을 가슴에 품었고, 크면서 천문학자의 꿈을 가졌다. 그리고 스무 살, 천문우주학과에 진학하면서 그 꿈에 한 발짝 다가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대학 생활은 '별을 즐기는 것'과 '미래에 대한 방황'을 하는 사이 그 어디쯤이었다. 보통 일(학습)과 취미는 같은 길을 가지 않는데, 그는 과와 상관 없이 가입할 수 있는 중앙 동아리인 아마추어 천문 동아리에 들어왔다. 그리고 공부로서의 천문학과 취미로 즐기는 별을 모두 경험했다. 천문대에서 일도 해보고, 동아리 회장도 해보고, 그 모든 경험의 결과는.. 아마추어의 승. 


졸업을 할 때쯤 그는, 더 이상 천문학자의 길을 가지 않기로 했다. 프로그래밍을 하고, 분석을 하고, 가설을 세워서 증명을 하는, 그런 연구자의 삶. 같은 과 선후배 동기들 대부분이 대학원의 길을 걸을 때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항공사에 취직했다. 그리고 별은 취미로 즐기기로 했다. 온전히 마음으로 즐기기만 하기로. 


그 동아리에서 만난 나와 결혼하면서 '같이' 별을 즐기게 되었고, 그렇게 함께 우리는 전 세계를 누볐다. 오로라도 보고, 남미에서 은하수도 보고, 세계 최대 광학 망원경도 보고, 개기일식도 보고, 별을 보았다. 그렇게 실컷 별을 즐기고 있던 중이었다. 





아버님의 칠순을 기념하여, 우리는 C의 부모님을 모시고 4명이서 미서부 로드 투어를 떠났다. 총 9박 12일의 일정. 라스베이거스에서 미니밴을 빌려, 자이언 캐년-브라이스 캐년-아치스 국립공원-모뉴먼트 밸리-호스슈 벤드-앤텔로프 캐년-그랜드 캐년을 거쳐 이제 마지막 코스, 크레이터를 향해 가고 있다. 


보통은 이렇게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를 돌면 그랜드 캐년을 끝으로 라스베이거스로 돌아가지만, 우리는 그 사이에 일정을 추가했다. 여기까지 갔다면 꼭 보고 싶은 신비한 흔적을 찾아. 그랜드 캐년에서 동남쪽으로 두어 시간 거리에 있는 '애리조나 미티오 크레이터(Meteor Crater)'를 보기로 한 것이다. 처음 일정을 짤 때, C가 소심하게 슬쩍 넣어 놓았는데 내가 보고 방방 뛰었던 기억이 난다. 왜냐면 나도 무척 보고 싶었으니까! 


크레이터라고 해서 덩그러니 큰 구덩이만 있을 줄 알았는데, 관광의 나라(?) 미국답게 잘 정비해 놓았다. 일단 아무나 접근할 수 없게 주변에 크게 철조망이 둘러져 있을뿐더러, 입구 건물을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도록 동선이 정리되어 있었다. 아무렴. 입장권을 받는 관광지이니.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건물 입구에서 표를 사고, 먼저 박물관 같은 곳을 둘러보게 되어 있다. 운석에 대해, 그 흔적인 크레이터에 대해, 우주 연구에 대해 나름 흥미롭게 잘 정리해 놓았다. 차근차근 그 내용들을 둘러보면서 점점 건물 깊숙이 가고 있는데, 유리창 너머 황량한 구덩이가 보인다. 오오. C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방금 전까지 하하 호호하면서 여유롭게 둘러보던 발걸음이 아니었다. 


바로 밖으로 나갔다. 우와, 한눈에 들어오는 크기가 아니다. 끝에서 끝이 무려 1.2km. 아무리 멀리서 보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휴대폰 광각 카메라로도 한 번에 찍히지 않는 크기였다. 끝과 끝을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쭈욱 돌려야 했다. 왼쪽 위로 언덕처럼 높은 곳에 전망대가 있었다. 우리는 그곳으로 일단 올라가기로 했다.


휴대폰 파노라마 기능으로 찍은 사진. ⓒ과거 사진첩


우다다다다다다다다다. 미친 듯이 바람이 분다. 몸이 휘청였다. 세상에 무슨 바람이 이렇게 세지? 이렇게 몸을 가누기 힘든 바람은, 칠레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에서 그레이 빙하를 땅에서 마주할 때 경험해 보았다. 그때는 빙하 따라 불어오는 바람이라 그렇게 센 건가 싶었는데, 여기는 이 커다란 구덩이를 타고 넘어오는 바람이라 이렇게 센 걸까? 마침 이때만 바람이 센 것이었는지, 원래 이렇게 센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어머님, 아버님과 나는 모자가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사진을 찍는 휴대폰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었다.


그렇게 제일 꼭대기 위 전망대에서 바람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C는 조용했다.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 건지 우리의 소란스러움을 모르고 있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입을 열려는 순간, 살짝 들썩이는 그의 어깨가 보였다.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 얼굴을 보았을 때, 그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27년 전, 책에서 본 꿈 꿔왔던 모습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서른넷의 현실은 이미 먼 길을 돌아와 있지만, 순수했던 시절 가장 강렬하고 오래도록 열망을 가지게 했던 존재와 마주한 순간. 그 순간이 가지고 온 울컥함은 결국 눈물이 되어 나오고야 말았다. 오랜 세월 동안 간직했던 꿈, 나름 치열했던 삶, 그 꿈을 포기한 삶, 그리고 먼발치서 마주한 과거의 기억. 27년의 세월이 그를 훑고 지나간 것 같았다. 조용히 그를 안았다. 센 바람도 그 순간은 우리를 비껴가는 것 같았다.


그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님, 아버님은 당황하셨지만 이내 같이 아들을 감싸 안으셨다. 이런 심경의 변화를 겪고 있는 아들을 보는 부모님의 마음은 어떨까. 그의 세월만큼이나 어머님, 아버님의 세월도 만만치 않으셨을 것이다. 그를 바라보는 시부모님의 눈빛을 보며 나는 또 짠해졌다. 다행이다. 이 순간을 모두 함께해서. 


거세게 부는 바람이 그의 눈물을 말려 버렸다. 우리 모두 이 순간을 열심히 즐겼다. 여기는 미국 애리조나 사막 한복판이고, 어쩌면 다시 오지 못할 테니까. 아래로 가면 바람이 조금 약할까 싶어, 아래쪽에 위치한 전망대로 이동했다. 정면에서 크레이터를 바라보는 위치였다. 그곳에 여러 대의 망원경이 있어 그걸로 크레이터 안쪽을 보기 시작했다. 위 쪽 전망대는 망원경이 하나라 혼자서 오랫동안 보기가 좀 그랬는데, 여기는 여러 대라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멀리에서는 그냥 흙 구덩이로 보일 뿐이었지만, 망원경으로 보니 그 안에 여러 가지 흔적이 있었다. 운석 구덩이 흔적은 지름 1.2km이지만, 사실 그만한 크기의 돌이 떨어진 것은 아니다. 떨어진 위치에서 발견된 운석은 지름 20~30cm가 되려나. 아래 사진과 같다. 하지만 우주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속도로 떨어지는 돌이 지표면에 부딪히며 땅이 충격을 받았고, 이 힘이 주변으로 퍼진 결과가 크레이터다. 이런 흔적은 지구 곳곳에 있다. 캐나다에 있는 마니코간 크레이터는 무려 지름이 100km에 달하며, 크레이터에 물이 고여 호수가 되었다. 크레이터의 흔적을 보기 위해서는 항공사진을 찍어야 할 정도이다. 공룡 멸종설에 언급되는 크레이터는 멕시코의 치크수럽 크레이터인데, 이곳은 흔적을 추정할 뿐이다.


좌) 미티오 크레이터에 떨어진 운석 / 우) 마니코간 크레이터의 흔적


미티오 크레이터 속을 확대, 확대해서 보다 보면, 성조기가 꽂혀 있고, 그 옆에 사람 크기의 우주인 모형이 있는데, 내가 서 있는 크레이터 끄트머리 위치에서는 맨 눈으로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우주인 모형 옆에는 또 철조망으로 조치된 구역이 있는데, 그곳이 정말 운석이 떨어졌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저 조그만 영역에 떨어진 저만한 돌이 주변에 미친 영향이 이 정도인 것이다. 영화 '토르 : 천둥의 신'에서 토르의 망치가 지구에 떨어질 때의 영향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만약 아마겟돈이나 딥임팩트처럼, 정말 큰 운석이 충돌한다면 지구가 멸망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정말 신기한 건, 어쨌든 지구에 그런 일이 없으니 우리가 지금 살아있는 것이다!


휴대폰으로 광각과 최대 망원을 오가며 영상을 찍었다. 무시무시한 바람 소리가 들어가 있다. 나름 이상한 목소리로 설명을 한다고 했지만 바람에 묻히는 말이 더 많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 어머님은 집에 있는 과학 책에서 C가 보고 꿈꿨다는 그 흔적을 찾으셨다. C는 얼마나 봤는지 아직도 그 책의 페이지 구성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릴 때 그 사진을 보고 꿈을 꾸면서, 먼 훗날 내가 정말 저걸 실제로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을까. 


C와 어머님이 나눈 카톡 대화 


어쩌면 그는 꿈을 이뤘는지도 모른다. 꼭 천문학자의 길을 가지 않더라도, 즐겁게 살면서 어린 시절의 열정을 마주하였으니. 오히려 순수한 마음으로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어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크레이터를 마주한 순간을, 그가 사랑하는 부모님과 아내와 함께 하였으니 그 또한 새로운 추억이 될 것이다.


과연 나에게도, 여러분에게도 이렇게 어떤 열정이 시작된 순간과 그 대상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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