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일탈
DMC역 4번 출구로 나와 불광천을 건너다보면, 북쪽으로 거대한 존재가 보인다. 북한산이다. 이미 서울의 풍경은 아파트로 둘러싸여 빌딩 숲 마천루를 이루고 있지만, 이곳만큼은 뻥 뚫린 하천 길 끝에 북한산 실루엣이 커다란 존재감을 내보이고 있다. 수시로 이 길을 드나들며, 북한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참 경이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멋있기도 하여 생각이 사라진다. 많은 잡념들을 이고 지고 가다가도, 이곳에서 산을 보는 순간 감탄하느라 전에 하던 생각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자연이란, 그런 존재인 것 같다.
그렇게 북가좌동에서 신혼집을 마련하고 살면서, 우리에게 북한산은 거대하지만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북한산 남서쪽에서 바라본 뷰. 그 모습은 양화대교를 지나며, DMC를 지나며 눈 앞에 익숙한 북한산 실루엣이 보이면 이제 집에 거의 다 왔구나 하고 마음을 놓는 효과까지 가져왔다. (C는 이쯤이 되면 내비게이션을 끄곤 한다.)
동네를 지나다니며 북한산을 바라보면서, 북한산이 얼마나 선명하게 보이느냐로 그날의 날씨를 가늠하곤 했다. 하늘이 파랗고 북한산 산세가 선명하게 보이면 이 날은 날씨가 매우 좋은 것이다. 하늘에 구름은 꼈지만 산세는 잘 보이면 공기는 깨끗한 날. 하늘도 뿌옇고 산세도 흐릿하면 미세먼지가 심한 날 등등. 이렇게 멀리 있는 산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일상을 함께 했다.
오다가다 멀리서 바라본 것뿐인데도 정이 꽤 들었나 보다. C는 어떻게든 북한산을 피사체로 담은 일주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도시 속에 있는 자연을 느끼는 사진. 세계 어디를 가도 대도시에 이런 거친 산이 있는 경우는 잘 없다고 하니, 가까이에 있는 축복을 어떻게든 담고 싶었던 것 같다. 거대한 도시 속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연 중 하나니까.
그렇게 우리는 북한산을 피사체로 사진을 종종 찍으러 다녔다. 날이 맑고 너무 춥지 않은 때에 맞추어서. 한 번 나가면 최소 2시간은 한 피사체를 중심으로 별이 움직이는 사진을 찍어야 하기에 밤의 추위를 대비할 것을 챙겨 가면서. 처음에는 불광천 산책로로 나가 자연과 도시, 그리고 북한산을 담고자 했다.
불광천을 따라가는 산책로 중간 어디쯤, 공연장처럼 넓은 데크와 계단으로 꾸민 공간이 있어 그곳에서 찍었다. 수다를 떨면서, 추위를 쫓아내기 위한 맨몸 운동을 하면서, 산책하는 개를 구경하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최소 2시간 정도를 한 장소에서, 연속적으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건 고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카메라를 지켜보는 것 외에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기에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생각을 기반으로 한 진지한 대화를 많이 나누게 되는, 의미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렇게 별 사진을 찍으러 가면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평소에는 일상에 치여, 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꼭 이런 순간에는 스멀스멀 올라와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다. 멀리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잠깐 밖에 나와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거실에 앉아 TV 또는 스마트폰을 보면서 드는 생각과 자연과 바깥 풍경을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은 다르기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이렇게 도시 속에 별 사진 찍기는 우리 부부의 일상 속 일탈과 같았다.
하루는 북한산 실루엣을 제대로 담기 위해 고양시로 갔다. 아직도 제대로 북한산을 인상 깊게 남기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고작 30여분 남짓 서울에서 떨어져 왔을 뿐인데 별이 꽤 많이 보였다. 오랜만에 안시 관측도 하고, 사진도 찍고 일석이조로구나. 우리나라에서 별을 보는 건 오랜만인 것 같았다.
늦은 밤, 동쪽 방향에 있는 북한산 위로 오리온자리가 떠올랐다. 산 너머로 정확히 오리온자리와 시리우스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오늘이야 말로 제대로 별과 북한산 실루엣을 담을 수 있는 기회구나 생각했다. 새벽 2시쯤 깊은 밤, 아직도 밝은 서울의 광해가 뒤에서 북한산을 비추어 산의 모습을 드러내 주었다. 여기서는 멀리 이렇게 한눈에 보이지만 사실 저 산은 무척이나 거대하고 험하다는 것을 알기에, 또 새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했던가, 왜 문득 이 문구가 생각나는지 모르겠지만 멀리서 바라본 산의 모습도 그런 느낌이었다.
아마 이 날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북한산을 모델로 사진을 찍은 건. 어느 정도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아니면 더 나은 사진을 찍을 자신이 없어서였을까. 일단 이외에도 서울에는 찍을 곳이 너무도 많기에 그곳들을 찍다 보니 어느덧 잊힌 듯하다. 그럼에도 북한산은 우리가 찍으러 다닌 일주 사진 피사체 중에 가장 많은 사진을 남긴 주인공이다. 언제나 뒤에서 든든하게 있어 줄 것만 같은 자연,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달라지는 자연이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우리를 포근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