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될 것이니 일단 가고 보자
한창 신혼이던 '16년 여름 무렵, C가 퇴근하고 와서는 부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내년에 미국에서 개기일식이 있대. 미국인들은 참 좋겠다."
"그래? 그럼 내년에 우리도 보러 가자."
"응? 미국까지? 일식을 보러 간다고?"
"해외여행도 다니는데 그게 뭐가. 어차피 여름휴가도 가야 하는데 맞춰서 여행하면 되지 뭐."
이렇게 우리의 '17년 여름휴가 계획이 세워졌다. 1년 전에. C는 단순히 부러워서 얘기를 꺼낸 것이었는데, 내가 그 미끼를 덥석 물다 못해 그를 떠밀었다. 아니 뭐가 걱정이람. 까짓 거 우리도 보러 가면 되지. 단순히 일식만 보러 미국에 간다고 하면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어차피 꾸준히 해외여행을 하면서 해외에 나가는 걸 부담스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우리는 항공사 직원 가족이라 항공권도 싸다!) C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생각의 틀을 내가 깨 준 것처럼 감격스러워했다. 그는 얼떨떨해하면서 행복하게 그 여행을 준비했다.
미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개기일식이 일어날 시기는 '17년 8월 21일. 남들보다 약간 늦은 여름휴가를 다녀오기 제격이었다. 나는 별도의 여름휴가 없이, 연 중 원하는 시기에 연차를 내고 쉬는 회사에 다니고 있고, C는 스케줄 근무이기 때문에 사전에 일정을 조율하면 웬만해서는 휴가를 갈 수 있어서 가능했다. 그렇게 16년 여름부터 C는 부지런히 '개기일식'에 대비한 여행 준비를 했다. 촬영부터 관광까지, 특히 2~3분 동안만 일어나는 일식을 후회 없이 즐기기 위해 열심히 알아보았다.
일식은 말 그대로 태양을 먹는 것이다. 달이 태양을 먹는, 달이 태양 앞을 지나면서 태양을 가려 지구가 어두워지는 현상이다. 개기일식이란, 달이 태양을 전부 가리는 현상이고, 달이 태양의 일부를 가리면 부분일식이다. 이는 태양이 달 보다 400배 크고, 지구-달까지의 거리보다, 지구-태양까지의 거리가 400배 멀기에 가능하다. 실제 크기와 관계없이, 지구에서 볼 때는 태양과 달이 비슷한 크기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둘의 경로가 겹칠 때, 완벽하게 가릴 수 있다. 정말 자연의 위대한 설계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대낮에 세상이 완전히 어두워지는 개기일식을 경험할 수 있고, 이는 생각보다 흔하게 발생한다. 대략 1~2년마다 한 번씩. (일식 자체는 이론상으로 6개월마다 한 번씩 발생하지만, 태양과 달의 거리가 조금씩 변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일식의 종류는 다양하다.)
일식이 일어날 때, 지구-달-태양이 일직선이 되는 장소에서만 개기일식이 가능하기 때문에, 지구에서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장소는 극히 제한적이다(반경 몇십 km 정도). 그마저도 지구의 70%는 바다이고, 30% 땅 중에서도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일부다. 개기일식이 자주 일어나도 인간이 볼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있지는 않은 것이다.
이번 미국 개기일식이 그 어느 때보다 이슈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개기일식이 99년 만에 일어난 것인데,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이 일식을 자유롭게 보고, 분석하기가 그 어느 때보다 수월했을 것이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본 일식으로 기록되지 않았을까. 오전부터 아메리카 대륙을 가로지르며 계속되는 일식의 스케일과 전 세계 사람들이 미국으로 올 수 있다는 접근성 때문이다. 거기에 우리도 일조하러 갈 계획이지 않은가.
* 잠깐 상식 : 우리나라에서는 남한 기준으로 1852년에 개기일식이 있었고, 다음은 2035년에 강원도 고성 일부(북한은 좀 더 넓음)에서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출처 : 네이버 천문학 백과) 사실상 개기일식을 보고 싶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렵고, 해외로 나가야 한다. 최근에는 2019년 7월 칠레에서 개기일식이 있었다. 2020년 6월 21일에 아시아 지역에서 있었던 것은 개기일식이 아니라 금환일식 (달이 지구에 좀 더 멀리 있어, 태양을 완벽하게 가리지 않아 금반지(링) 같은 모양이 나타나는 것)이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부분일식으로 관측 가능했다. 그리고 다음 개기일식은 올해 12월 남아메리카 남부(칠레, 아르헨티나 남쪽 끝), 남극, 아프리카 남쪽에서 관측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게 1년여 전부터 일식 여행을 준비했다. C는 무엇보다 개기일식이 진행되는 장면을 어떻게 사진으로 담을 것인지 고심했다. 먼저 장비부터 생각했다. 어떤 장비로 찍을 것인가? 우리에게 망원경이 있지만, 이걸 미국까지 들고 갈 수는 없었다. 경통 길이 1200mm의 거대 망원경이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포기. 우리가 가진 DSLR 렌즈를 살펴봤다. 망원 기능을 위해 신혼여행 가기 전에 샀던 70-200mm의 탐론 렌즈다. 초점거리 200mm로 태양을 담기에는 부족하다. 아주 작게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망원이 되는 렌즈가 필요한데, 여기서 고민이 깊어졌다.
태양을 적당한 사이즈로 찍기 위해서는 못해도 400mm가 넘는 초점거리를 가진 렌즈가 필요하고, 시중에는 600mm까지 확대되는 렌즈들이 많이 있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백통'인 캐논 렌즈는 가격이 신품 1400만 원, 중고 600만 원일 정도로 엄청 비싸다. 이건 중고든 뭐든 탈락. 시그마 렌즈는 신품 220만 원, 중고 170~180만 원 정도였고, 탐론 렌즈는 신품 110만 원, 중고 70~80만 원 정도였다.('16년 당시 시세) 브랜드별 가격 차이가 많이 나는데, 현재 쓰고 있는 70-200mm의 탐론 렌즈가 꽤 쓸만했기 때문에 그중 가장 저렴한 탐론 렌즈로 관심이 기울었다.
무엇보다 C가 '중고로 사서 중고로 팔면 되지!'라고 해서 캐논 렌즈를 중고로 샀다 중고로 팔아볼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혹여나 마음이 바뀌어 팔지 않고 갖고 싶어 진다면 어떡하나 싶어, 그나마 가계 경제에 타격이 덜한 탐론으로 최종 결정하였다. 일단 탐론 150-600mm F5-6.3 렌즈로 중고 구매 완료. 조리개가 좀 아쉽지만 우리는 삼각대를 두고 태양 촬영용으로 쓸 예정이니까 괜찮다.
다음은 태양 필터 고민. 태양을 직접 보고 촬영하는 건 불가하다. 센서가 타는 등 카메라가 고장 날 확률이 크다. 그렇기에 대부분 '태양 필터'라는 것을 렌즈 앞에 부착해서 태양을 촬영한다. 흔히 우리가 보는 태양 사진이 이글이글 불타지 않고, 깔끔한 동그라미 모양인 이유이다. 빛을 최대한 줄여, 태양의 흑점까지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필터들은 값이 좀 나간다. 특히 카메라 촬영 시, 세팅을 편하게 할 수 있는 글라스형 필터들은 10만 원 이상부터 고려해야 한다.
C는 언제나 최저의 가격으로 최고의 효과를 노리는 가성비 지향적인 사람이다. 우리가 가진 장비는 망원경, 카메라 등 많은데 장비마다 태양 필터를 좋은 것으로 설치하려면 돈이 꽤 많이 든다. 그래서 C는 고심 끝에, 날 것 그 자체인 A4 사이즈의 필름형 필터를 구입한 뒤, 그것을 본인이 요리조리 자르고 붙여서 망원경용, 카메라용으로 쓰기로 했다. 앞서 구입한 탐론 렌즈 후드에 사이즈를 맞춘 태양필터를 C가 자체 제작하였다. 학창 시절 만들기는 이럴 때 쓰라고 배우는 거라며 뿌듯해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난다.
태양 필터는 개기 일식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쓸 것이다. 태양이 달에 완전히 가려지고 나면 이제 필터는 필요 없다. 온 세상이 어두워져 더 이상 빛을 줄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때는 선글라스도 보호 필름도 없이 맨 눈으로 태양을 봐도 된다. 태양 주위의 코로나와 홍염을 맨 눈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일단 가지고 있는 장비들을 총동원하기로 했다. 5D Mark Ⅲ을 주축으로 개기일식 촬영을 하고, 나머지 700D 카메라로는 우리를 찍고, 액션캠으로는 이 모든 모습을 영상으로 담을 것이다. 우리의 짐은 이 장비들 위주로 채워질 것이다.
마지막까지 고민한 것은 그래서 일식을 보러 미국의 '어디로' 갈 것인가 였다. 일단 미국 내에서 제일 길게 개기일식이 관측될 곳은 중동부 내륙에 위치한 Nashville(내슈빌) 근처였다. 3분가량 개기일식 관측이 가능하지만, 그곳에 접근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일단 시카고까지 비행기를 타고 간 뒤, 국내선을 타야 하는데 이 여정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날씨가 맑을 것이라는 확신도 없었다.
개기일식을 볼 때 또한 구름이 매우 중요하여,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어야 제대로 태양과 달의 변화를 관측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개기일식을 1분 더 보는 것보다 구름이 없을 것이 확실한 날씨였다. 미국 서부의 8월은 거의 항상 맑았고, 여행 직전까지도 맑음이 예보되어 있었기에 우리는 최종적으로 Salem(세일럼)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시애틀까지 국제선을 타고 간 뒤, 렌트를 해서 운전하여 세일럼으로 갈 생각이었다.
C는 1년 여간 시카고를 중심으로 한 내슈빌 개기일식 관측과, 시애틀을 중심으로 한 세일럼 개기일식 관측을 고민했다.(항공사 직원 티켓을 이용하다 보니 티켓을 확정할 수 없어 고민의 시간만 길다.) 막판 1개월여 전부터는 날씨, 접근성, 이동거리 등을 고려하여 시애틀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고 본격적으로 숙소를 알아볼 때쯤엔...
개기일식 전 날 기준, 세일럼뿐만 아니라 인근 포틀랜드까지도 숙소에 빈 방이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호텔 예약 사이트들 뿐만 아니라 에어비앤비에서도 없었다! 하하하. 역시 전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는 개기일식이구나. 이미 아주 오래전에 매진이었구나. 충격이었다. 포틀랜드라는 나름 알려진 도시에 우리 몸 뉘일 곳 하나 없다니.
시애틀에서 세일럼까지는 차로 약 6시간 거리, 포틀랜드에서 세일럼은 약 2시간 거리다. 그런데 일식은 오전 9시 5분 부분식 시작, 10시 20분경 완전한 개기일식, 12시쯤에는 부분식 종료로 이어진다. 방은 없고, 시애틀에서 새벽 일찍 운전하고 오자니 도로 사정이 어떨지 몰라 망설여졌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번뜩이며 스쳐간 아이디어.
그냥 차에서 자자
까짓 거. 하룻밤인데. 그냥 차박을 하기로 하였다. 평소에 나는 잠 잘 곳을 매우 가려 캠핑도 잘 가지 않았다. (허리가 아파서 침대가 필요하다. 그것도 좋은 침대가...) 그런데 내 입에서 차박이라는 말이 흘러나오다니. C는 정말 그래도 되냐고 두 번, 세 번을 물어보았다. 아니 1년여를 생각하고 기다린 여행인데, 그리고 장비를 갖춘다고 들어간 돈이 얼만데! 고작 1박 숙소가 없다고 안 갈 수는 없지 않으냐며 나는 반대로 C를 설득했다.
그렇게 우리는 커다란 SUV를 빌려, 뒷좌석을 접어 눕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장비로 가득 찬 짐에 차박에 대비한 짐까지 준비했다. 학창 시절, C가 지리산 등반할 때 쓰던 침낭을 2개 챙겼다.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가고 보자는 게 내 생각이었다.
2017년 8월, 17일~23일, 5박 7일의 일정으로 우리는 시애틀행 비행기를 탔다. 시애틀에서 3박을 하며 여행을 한 뒤, 렌트를 해서 세일럼으로 이동하여 차에서 1박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일식을 보고 시애틀로 돌아와 1박을 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 아주 좋은 일정이라 생각했다. 그 엄청난 일정을 직접 겪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