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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Grace Nov 30. 2024

무기력 토요일

언제는 안 그랬냐만은.

언제는 그렇지 않았냐만은, 오늘은 조금 더 무기력하다.

새벽 네 시에 잠이 든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전 아홉 시에 눈이 떠졌다. 이유는 단순하다. 배고파서.

직장을 그만두고, 남은 월급으로 카드값을 대고, 이것저것 메꿀 곳에 메꾸다 보니 돈이 없어서 나가서 무엇을 먹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문득, 올해 2월에 제주도를 다녀오며 누군가에게 주려 샀지만 미처 주지 못한 감귤 타르트가 떠올랐다.

냉동실 어디쯤에 박혀 있겠지. 찾았다. 찾아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뒤 편의 유통기한을 확인하는 일이다.

다행히 올해 말까지라고 한다. 허겁지겁 입에 넣는다.

단 것을 먹었더니 커피가 마시고 싶다. 밥 먹을 돈이 없어 9개월 된 감귤 타르트를 꺼내 먹었는데, 커피 마실 돈이 어디 있겠나. 마침, 2월 초에 이사하며 집 앞 대형 할인마트에서 샀던 커피 스틱이 생각났다.

찬장 어딘가를 뒤지고, 물을 끓여 커피를 타 마셨다.


조금 식을 때까지 기다리다 몇 모금 마신다. 지금 나에게는 커피의 향을 따지는 것은 사치다.

카페인이 몸을 조금 덥힌다. 난방비가 아까워 전기장판 하나로만 버티는 나에게는 좋은 신호이다.

정신을 조금 차리고, 해야 할 문서 작성 몇 가지를 마쳤더니 눈이 감긴다. 다섯 시간 남짓 자고 눈을 떴으니 그럴만하다. 잠시 눈을 붙인다. 어느 날은 그렇지 않았겠냐만은, 오늘은 한가하다.


한 시간가량 눈을 붙였다 일어난다. 휴대폰을 열어 별 의미 없는 활동을 반복한다. 일이 조금 들어왔으면 좋을 텐데, 몇 번의 스크롤을 반복하다 배경화면을 본다. [화양연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이라는 뜻의 단어라고 한다. 음, 괴리감이 조금 엄습하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한다. 당장 배고픈 작가이자, 그림쟁이에게 당치 않은 괴리감이다.


열 두시 반, 배가 고프다. 싱크대 밑 찬장을 열었더니, 소비기한이 단 3일 남은 컵반이 있다. 나름 운수가 좋다. 5분의 시간을 기다리자 나에게 그래도 꽤 괜찮은 탄수화물과 단백질과, 지방을 공급해 주는 밥이 된다. 후다닥 먹고, 몇 번을 다시 보았던 영화를 넷플릭스에서 찾아서 잠시 본다. 본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집중하지 못하지만, 그 감성과 감정은 나에게 다시 전해진다. 


[이터널 선샤인]

나에게는 이 정도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너무 사랑해서, 모든 기억이 다 지워졌는데도 다시 함께하는 그 사랑이 있을까?

눈물과 분노와, 미움과 사랑과, 욕망과 질투, 그 모든 감정을 함께 겪어가며 어떤 하루를 보냈을지언정, 어떤 싸움을 하였을지언정 함께 누워 '사랑한다'는 말을 서로에게 속삭일 수 있는 사랑이 있을까?


괜히 허탈해진다. 꽤 치열히 살았다. 나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하여 최선을 다 하였다. 질병이 온 세계를 덮었던 그 시절부터, 아니, 그전 다른 꿈을 꾸었을 때부터, 나는 치열했다. 잠을 줄이고, 밥 먹을 돈을 아꼈다.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나고, 마주하기 싫었던 상황들도 정면으로 마주했다. 몇 번의 마주침과 몇 번의 회피와, 몇 번의 망가짐과, 몇 번의 행복을 겪고 나에게 남았던 것은 작년 4월 저지르고야 말았던 대 소동과, 그로 인해 나의 발목에 남겨진 화상 흉터이다. 


사랑에 실패했다. 짧은 만남이지만 나는 깊었다. 눈물을 흘리며 잡았다. 없어졌다. 닿지 않는 곳에 있다.

지극히 실패했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았지만 그랬기에 우리는 서로의 실패가 되었다.


꿈은 나를 버렸다. 아주 좁은 문이지만, 나에게는 기회가 있을 줄 알았다.

시장이 좋지 않다는 단순하면서 명료한 그 이유로 도망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 내가 그 고민을 하고 있다.


내게 남은 것은, 후회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오기 꺼려하는 그림 몇 개다.


다 식은 커피를 홀짝이고, 돈이 없어 끊어야 하나 고민하는 전자담배를 물고, 매캐히 타오르는 인센스의 향을 맡으며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초라해 보이는가? 초라하다. 돈 없는 예술인의 삶은 역시 그렇다.

그러나 아름답다. 나는 내가 아름답다고 말한다. 별 거 없는 하루를 보낼지언정, 사랑에 실패했던 기억이 나의 목을 조를지언정, 양에 차지 않는 간편식 하나로 끼니를 때울지언정 나는 아름답다.


문장을 쓰고 있다. 글을 적어 내려간다.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의지로 이력서를 수백 통을 회사에 보낸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린다. 그리고, 말한다. 그리고, 적는다. 문장의 길이를 줄이고, 그림의 사족을 제한다. 가장 단순하면서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삶이 아름답지 않다면 무엇이 아름다운가. 살아보려는 치열한 피냄새나는 의지로 하루씩 버텨내고 있는 이의 삶이 아름답지 않다면 누구의 삶이 아름다운가.


그래서 나는 아름답다. 냉골 바닥에서 피어오를 꽃 한 송이를 보고, 잠시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사라질지언정 나는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이 있기에 차가운 여섯 평 방 안에서 따뜻함을 그리고, 따스함을 적는다.


그래, 나는 아름답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삶을 살아내고 있을 당신에게도 이 말을 건넨다.

당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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