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었다.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미뤄 두었던 지난겨울을, 이젠 정말 힘을 내 정리를 해야지 한다. 게으름도 어느 정도지, 정말 이렇다 할 것도 없으면서 뭐라도 하려면 이렇게 마음을 다 잡아야 하니, 겉보기와 달리 쇠약해지는 모든 것들이 오늘따라 더 서글퍼진다.
왜 그렇게 변해가는 것들에 대한 접근이 어려운지 모르겠다. 계절을 보내야 하는 것도, 새로움 속에 묻어 들어가는 것도, 그저 멈춰서, 고장 난 신호등 아래 기대어 초록불이 켜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다.
언제부터였을까?
일상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점점 무뎌지는가 싶더니, 이젠 부딪치며 접촉하고 살아가는 것들마저 시큰둥해진다. 특별하게 애착이 가는 것도, 무언가 딱히 만족스러울 것도 없이, 그저 하루를 무사히 넘기면 된다 생각을 하며 살고 있었다.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메말라가는 감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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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리 많은 것들에 대해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걸까? 통속적으로 살만하거나 배가 불러서, 또는 그 나이가 되면 대부분 몇 개의 우울증 증세는 갖고 있다 로 치부해버리고 말면 속편 할 것을, 나의 내부에선 쉬이 용납하지 못하고, 반성하라며 회초리를 가해오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만다.
탄력성을 잃어가면서도 창조적인 삶은 포기하기 싫은 미련이었다.
소크라테스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검토 없이 사는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라고, 그래 나도 한 번쯤 검토를 해봐야 하는 시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지난겨울 내내, 아니 꽤 오랜 시간, 끝없는 질문을 지속적으로 내게 던져오고 있었다. 조각의 질문은 어느 순간 해답을 내어 주기도 또는 그냥 미뤄두거나 아예 질문 자체를 잊어버리게도 하였다. 서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몇 개의 질문이 조금씩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엇보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심적 허기였다. 통제 불가능한 이 감정이 더욱더 나를 게으름의 늪으로 깊게 빠져들게 하고 있었다. 허무주의자도, 염세적이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나일뿐인데, 왜 그렇게 허기가 지는지, 사람 속으로 스며들면 좀 나아질까 싶지만 일시적인 해결 일 뿐, 해갈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과장되게 지쳐간다.
정리의 순서상, 지하철을 타고 동대문 원단시장을 향했다. 한 식구가 된 지 2년 만에 우리 콩이는 식탁의자를 비롯해 가죽이란 가죽을, 정말 열심히도 다 긁어놓았다. 그래 늙어가는 여자처럼 앉아있는, 낡은 모습의 가구들에게 먼저 생동감을 입히기로 한다.
코로나 19 탓에 시장은 지나치게 한가하였다. 평소 같으면 신경도 쓰지 않을 소매인 조차 상인들은 과한 관심을 보였고, 그 길을 뚫고 지나며 원하는 이미지에 꿰맞출 원단을 찾는 일은 불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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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에 상관없이 선택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넘쳐나는 것들은 오히려 생각하던 목적을 흔들었고, 결국은 부족한 참을성이 먼저 바닥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다행스럽게 더 이상 나갈 곳이 없다 생각이 되어질 때, 맘에 드는 원단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긴 시간 발품에 대한 확실한 보상이 주어진 셈이다.
사는 동안 다른 선택은 어떠하였을까? 생각을 해본다. 뜻과 상관없이 제풀에 지쳐 포기를 하며 좌절감에 빠져들거나,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적당함에 동조하여 모나지 않은, 탈 없이 편안함에 안주하는 둘 중의 하나였다.
그때부터 심장은 조금씩 병들어가며 오늘을 무감각하게 만들어 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길을 걷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돌아오는 길은, 무표정하게 지친 사람들과의 만남이 되었다. 열정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공통적 모습이다.
망상일지라도 그들이 저 바닥 밑으로 꺼져가는 생명력을 끄집어내어 다시 한번 파닥거리는 심장으로 살아보았으면 싶지만, 나 또한 널브러져 겨우 숨을 쉬는, 뭘 해도 재생 불가능한 심장으로 그만 쉬고 싶다는 마음이 있기에 바랄 것은 못되었다.
한동안, 서둘러 일어나 커피 한잔과 손바느질을 시작했다. 허기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야 겨우 밥을 먹는다. 한 단계 씩 나사를 풀고, 재단을 해서 바느질을 하고, 또 나사를 조인다. 그러한 과정에 재미가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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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과정임에도, 삶에선 어찌해서 그렇게 슬쩍, 쉽게 넘어가려는 경우가 많았던지? 천천히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은 순리대로 흐르지 못한 것들로 인하여 이렇게 긴 시간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겨울옷을 정리하고 두꺼운 이불 커버를 세탁해 햇빛에 난다. 장롱 문과 서랍 문도 열어줘 바람이 드나들게 하였다.
정리가 끝나자 가슴 가득 흡족함이 차 오른다. 그러고 보니 참 평온한 며칠이었다. 핸드폰이나 인터넷 같은 인스턴트식품으로 마음에 허기를 채우지 않아도 좋았다. 그러고 보면 이 감각의 죽음은 열정의 상실보다 빠름에 빼앗긴 느림 인지도 모르겠다. 작은 것들이 주는 단순한 행복을 놓치며 설렁설렁 넘어가다 보니 무감각한 것이 당연해졌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세탁소로 떠나는 옷들을 따라간다. 며칠의 여행이 끝나면 옷들은 다시 활기차게 새것처럼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마음도 세탁소에 맡겨 그리되었으면 하는 여유가 생긴다.
천천히 닦아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공원엔 목련 꽃이 저렇게 활짝 피었건만 나에겐 이제야 봄이 오기 시작한다. 무엇도 아쉬울 것 없는 평화다.
애초에 행복하지 않게 태어났다는 철학자 러셀이 노년에 이르러서야 삶을 즐기게 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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