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작별'

by 여름나무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 같아요.”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살짝 들어왔다. 겨우 이초 가까이 흘렀는데 그녀의 아랫입술과 혀끝이 조금 녹는다.


그녀는 여섯 시에 오기로 한 그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매일 산책하는 천변 길을 걸어 약속 장소 근처로 왔고, 이십 여분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물가의 벤치에 걸터앉는다.


잠이 쏟아졌다. 잠들면 안 되지 생각하는데 정말로 잠이 들었다. 길어야 십 분, 필 경 그보다 더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 그사이 눈이 내려 있었다.

뭔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몸이 자신의 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장갑 낀 손으로 눈을 비비자 고운 눈가루가 떨어져 내린다.


. . . . . . . 눈사람이 되어있었다.

얼른 밤이 되어 하늘에 별이 가득 반짝였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눈사람에겐 더 이상 영하의 날씨가 쌀쌀하지 않다. 어쩌면 뭔가에 부딪쳐 눈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리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사라져도 좋을 만큼 이별은 누구에게나 힘이든 법이다.


그녀의 몸은 전체적으로 둔해졌거나 약해졌지만 마음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수면내시경 검사를 위해 마취 유도체를 맞아본 이후 처음으로 경험하는 완전한 고요다.

한참을, 그를 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최대한 조금이라도 더,

어떤 일에도 적용치 않던 말이다.

그를 붙잡고 싶었다.

....이쯤에서 이별을 하는 것이 옳았다.


다니던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한 채 신도시로 내려온지 반년이 지났다. 대학을 갓 졸업한 이듬해 아이를 낳고, 십 년째 열일곱 살짜리 아들과 살고 있는 그녀는 지금,


눈사람이 되어, 일곱 살 연하의 직업도 없는 가난한 이 남자와 입맞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은연중 언젠가는 그와 헤어져야 한다 생각을 하며 시작된 사랑이었을 것이다. 눈사람이 되어버린 오늘이 다른 그 어느 날보다 이별이 쉬울, 그날인 것이다.

오늘을 위해 천천히 차가워져 눈사람이 되려 하였는지 모른다.

다행스럽게 그를 만나기 전, 눈사람이 될 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눈사람은 생명체가 아니다. 그러니 마음도, 생각도 없다. 어느 곳이고 하얀 눈으로 가득 찼을 뿐이다.

헤어짐을 감당키 위해 그녀 스스로 눈사람이 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눈사람은 어떤 아픔이나 슬픔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몇 초의 입맞춤에 입술이 녹듯,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알아차렸다. 단단하고 고요한 눈 덩어리-그녀의 새로운 몸에서 한 군데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예전처럼 심장이 뛰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직 그곳이 미미하게 따뜻했다. 그 언저리의 눈이 녹아 약간의 물이 왼쪽 가슴 아래에 고여 있었다. 조금씩 더 녹고 있는 건지, 반대로 심장의 중심까지 마저 얼어붙는 중인지 확실치 않았다.


별일 아니라고,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이 다를 바 없는

연속적인 날에 있을 수 있는 하나의 일이라고 수없이 혼잣말을 되 뇌이며 최면을 걸어보지만, 알고 있었다.

숨겨도 드러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전까지 없었던 무엇인가가 두 사람의 사이에 생겨난 이유를, 처음부터 그는 앞날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함께 할 미래의 기약도 없었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던 지난여름의 저녁을 그녀는 기억한다.

어두워져 가는 그의 방 침대에 마주 모로 누워, 과거도 미래도 사라진 이상한 곳에 그들이 고립되었다고,

거의 인간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절대적인 신뢰만이 둘 사이 존재한다고 느꼈던 감정을,

아이 외의 타인에게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눈이 되어서인지 더 이상 그 무언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그가 우뚝 멈춰 섰다.

“너무 추워요”

그가 다가와 그녀의 눈을 들여다봤다.

“기분이 이상해요. 당신 눈동자에 내가 비치지 않으니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지나는 듯했다.

가끔 신은 주시지 않아도 될 능력을 인간에게 주신 듯하다.

불행하게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랑이 떠나는 순간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학창 시절부터 경쟁에서 가까스로 살아남는 사람, 특별히 뛰어나진 않으나 실수를 하지 않으며 성실한 사람이었다. 일복이 많은 편이어서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아 기르며 여러 직장을 전전하면서도 출산휴가로 얻었던 두 달 말고는 길게 쉬어본 적이 없었다. 이젠 나이가 있으니 예전처럼 다음 직장으로 바로 환승하는 일이 쉽지 않으리란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초초해한다고 달라질 것 없다는 사실 역시 잘 알았다. 몇 달은 실업급여가 들어올 것이다. 그녀 스스로 최악의 가능성들에 대비해야 했다. 그녀는 오뚝이 인형처럼 현재의 시점으로 되돌아와 침착하게 장단기 계획을 다시 세웠다. 실손 보험을 불입하고, 최소한의 한 달 치 식비와 생활비를 제외한 가외비용을 절약하고, 예금 잔고와 적금 만기를 계산하고, 아이의 대학자금을 차질 없이 준비하기 위해 한 해의 예산을 미리 짜고 연말마다 결산을 해야 한다. 미결로 남는 것은 오직 하나의 문제, 그녀 자신의 노후였다.


어쩌면 사랑은 돈과 같은 건지도 모른다.

돈 없는 자에겐 사치가 될 경우가 있는 게 사랑이다. 사랑도 진열된 상품이라면,

마땅히 그 상품을 사용할 만큼 여유 있는 자들의 소비품목이 될 것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내야 할 세금보다 그녀의 가슴을 두드리진 못할 것이다.


그녀는 가방 속 지갑을 더듬었다. 만 원 권 지폐 두 장을 꺼냈다.

“이걸로 저녁을 사 먹어요.”

그가 지폐 두 장 중에 한 장을 받으며, “근처에 있을게요.” 한다.

그녀가 아이를 만나고 돌아오는 동안 그는 식사를 하고 올 것이다.


현관에서 만난 아이는 엄마를 부르려다 말고 반쯤 벌린 입으로 눈사람이 된 그녀를 건너다봤다.

“너무 놀라지 마, 엄마가 눈사람이 되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나도 몰라 잠깐 사이에 그렇게 됐어, 아까 조금 눈이 올 때 벤치에 앉아 있다가”

“그럼 지금 집에 못 들어와?”

“녹을 테니까?”

“경찰에 신고할까?”

“경찰이 뭘 할 수 있겠어,”

“병원에 가면 어때?”

“의사들이 뭘 할 수 있겠어,”


경찰은 떠나는 사랑도 잡아 줄 수 있을까? 이별에 상처도 치료받을 수 있다면 중증으로 입원해 한 열흘쯤,

길게 쉬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횡단보도를 무단으로 건너 하천이 내려다보이는 계단에, 더 이상 늑골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걸터앉는다.

‘하지만 무서울 게 뭐야,’ 문득 소리 내어 그녀는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렸다.

‘늑골이 무너지고 옆구리가 부스러지면 어때’, 뒤이어 생각했다.

‘이렇게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좀 전보다 또렷하게 목소리를 내어 그녀는 중얼거렸다.

‘고통이 없다면 두려움도 없지’

더 단호하게 몸속으로 파고들 냉기가 필요했다. 늑골과 심장의 중심까지 단단히 얼려 어떤 것도 더 부스러지지 않게 할 한파가 필요했다.


독해져야 했다. 마음도 꽁꽁 얼어 제자리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곧 무뎌질 것이다.

그녀는 어두운 냇물을 내려다보았다.


저 검은 물속 어딘가에 여름의 잉어들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은회색 비늘을 빛내며 수면으로 올라올 아열대의 여름으로 그녀는 들어서지 못할 것이다. 어째서인지 그녀 자신 역시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피와 살과 내장과 근육이 있는 몸을 다시 갖고 싶지 않았다.


사랑은 이제 아주 불편한 언어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앞으로 그녀는 흉물스러운 화상 자국을 뒤집어쓴 채 세상을 만나,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디 있어?” 아이가 물었다.

“가까워 아파트 앞 횡단보도야” 전화를 끊는 순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허공에서 흩어져 내려오는 것, 말할 수 없이 친근하고 아름다운 것, 수천 올의 속눈썹처럼 작고 가벼운 것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눈은 새벽에 내린다고 했는데......


어쩌면 이 눈송이들로, 그녀의 얼굴과 몸에서 녹아 사리지고 손상된 곳들을 세심히 복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흩어져있던 퍼즐을 겨우 꿰맞춘 느낌이 들었다. 이제 더 이상 퍼즐을 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퍼즐은 꿰맞추기 전까지만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눈사람이 되어 이별을 해야겠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한강이라는 작가를 좋아하고 있었다. 몇 번을 다시 읽어본다.


상처의 깊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떠나보낸 사랑을 기억할 것이다. 아주 가끔 붙잡는 현재의 삶과 책임감에 사랑을 버려야 할 때가 있다.


시장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 외투를 수선하듯이 마음을 수선해,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다행히 살아보지 않은 내일은 모른다.

혹여, 그대가 아직 내게 오지 않았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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