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앓이

by 여름나무


흐림이 스며들었다.

여기저기 쑤셔되는 뚜렷하지도 않은 통증이, 땅이라도 파고 들어가 누우면 괜찮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러고 보니 약 팔자고 늘어놓았던 홈쇼핑의 체크박스 중, 만만하게 벗어날 수 있던 증상은 드물었던 것이다.


이제 비가 오려면

굳이 일기예보를 듣지 않아도

내 할머니처럼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온몸이 가슴에 불덩이 하나 들어선 듯 뜨겁게 달구어지다

어렵사리 불붙은 욕정이 그럴까 싶게 급냉각되어지고 만다.


어디 한 군데 아프다는 것이 이리 크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건만

언제나 통증은 감당하기 버겁고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몸살처럼 앓아누워 멈춰 선 내 곁을

세상은 잘도 비켜 흘러가고 있단 생각이

마음으로 스며든다.


산다는 거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해 아파질 때가 있다.

그런 날엔 부르지 않아도 구태여 찾아오는 기억이 많아진다.


엊그제의 일처럼

가끔은 묶은 상처가 아파질 때다.


검고 단단한 딱쟁이가 떼어지고

여린 속살이라 더 그늘진 자리가 돼버린 곳

그럴 땐,

괜한 것들을 이것저것 건드려보지만

다 소용없는 짓이 되고 만다.


아픈 입맛이

왜간장에 참기름 몇 방울을 떨궈 비벼주던 할머니의 손맛을 그립게 한다.


딱 그만큼,

그분은 그리 말씀하셨다.


인연이란, 딱 그만큼

갚을 만큼 갚아서

더 이상 갚아야 할 빛이 없을 때 풀려나는 것이라고


이승에 인연이란

전생에 진 빛을 받기 위해 찾아온 채무자일 뿐,

부부의 연도

부모 자식 간의 연도

오고 가는 많은 만남도


딱 그만큼,

받아야 할 만큼 받아가면

미련도 남지 않는 게 인연이라 하였다.


그러니 끝난 인연에 애달플 것도

아쉬워할 것도 없이

가던 길을 가야 하는 것이

맞다 하였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되갚아야 할 질긴 인연을

진통제 몇 알과 여기저기 붙여둔 파스 몇 장으로 떼어낼 수도 있는 시대

그만함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되어 웃음도 지어지는 날들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어느 인연이고

그리 연연할 필요가 없는 것임에 의의를 달리도 없건만


어쩌다

그런가 보다 하고 잘 굴러가던 것들이

가끔 의도치 않게 안 그런가 보다가 되진다.

이상하게도 순간,

인연은 새끼줄을 꼬듯 꼬아져

서로를 옭아매게도 된다.


그런가 보다엔 보이지 않는 거리가 있다.

알면서도

살다 보면 두어야 할 거리를 잃게도 된다.


번거로움이 싫어질 나이가 되었다.

딱 그만큼일 때

인연에도 사납게 도끼질을 해야만 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된다.


때론 둥치를 잘라낸 그루터기에 앉아

앓이를 추스르며 쉬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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