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잘라내다

by 여름나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여름 더위에 늘어져 그런가 보다 했는데, 뭔가 뒤숭숭한 것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숲길을 지나 풀밭을 거쳐 바라보는 하늘 길로부터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 바람에 휘돌리는, 머리를 둘러 감은 수건을 풀어내고 긴 머리를 헤어드라이기로 말리기 시작했다. 늘 하던 일이 오늘따라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길에 단골 미장원에 들러 긴 머리를 잘라내야겠단 생각을 한다.


먹이를 노리며 숨어있던 살쾡이처럼, 한여름의 더위에 대책 없이 늘어지는 마음을 잡을만한 마땅한 대상을 노리고 있던 거였다. 사냥감이 정해지자 마음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싹둑 잘라낸 머리를 감고 가볍게 털어낼 것을 생각하자 벌써 기분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뭔가 해야겠다, 생각을 하자 기다림의 시간은 더디 갔다. 결국 참아내지 못하고 짬을 내어 사무실 근처 미장원으로 발길을 둔다. 미련 없이 시원스레 짧은 단발머리가 되었다.


이런 기분이었을까? 로마의 휴일에서 미장원에 들러 긴 머리를 자르고 나오는 오드리 헵번의 표정이 떠올랐다. 비교하기엔 한없이 부족하지만 기분만은 그녀 못지않았다. 걸음걸이가 가벼워지고 행동이 빨라지고 있었다.


뜬금없이 복잡하거나 어지러운 것들도 이리 잘라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하긴, 머리카락이 무슨 죄가 있다고, 마음은 못 잡으면서 애꿎은 머리카락만 잘라내는 것이다.


단조로움에 삶이 빛을 잃어간다면 머리를 잘라내는 일은 가끔 그러한 마음을 잘라내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머리 모양새의 변화는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사랑에 열병을 앓고 난 다음이나, 단단한 각오가 필요할 때 머리를 잘라낸다. 머리 모양새에 변화를 줘 새로운 다짐을 외부에 보여줌으로써 행동에 변화를 꾀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에겐 최면의 효과를 타인에겐 함부로 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엄포가 되기도 한다.


동료들이 “머리 하셨네요? 무슨 좋은 일 있나 보네요”, “활기 있어 보여요” 한다.

좋은 일? 그랬으면 좋겠다. 머리를 잘라내니 시원한 것이 우선 좋은 일이요, 마음도 몸도 조금 가벼워지니 좋은 일이긴 하다.


가끔 그녀들은 말을 하지 않고도 변한 머리 모양새로 좋은 일이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애인을 만나러 가는 날이다. 새삼 저런 시절은 다 지났구나 부러워하는 내게 확인 사살까지 하고 만다. 무조건 고얀 것들이다.


머리 모양새만큼 그 사람의 이미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많지 않다. 그래 그만큼 변화를 주기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런 변화를 오늘 나는 하였다. 그런데 슬프게도 별거가 없다.

왜?

창경궁이라도 가서 짧은 머리로 석고대죄라도 해야 되나? 그러면 저만치에서 그레고리 펙이 웃으며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긴 머리를 잘라내 쳐져있던 모습을 벗어나는 것만으로 오늘은 참 감사한 일이다.


세상사 마음먹기 달렸다는데, 이렇게 마음먹기가 힘들어서야,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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