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포핀스

by 여름나무

메리 포핀스!

붉은 뺨을 하고 재미있는 놀이를 많이 알고 있어야 하는, 아이들이 원하던 유모의 조건이다.

그녀는 하늘을 날아 원하는 곳 어디든 데려다줄 수 있는 마법사이기도 해, 만약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한 번쯤 내게도 저런 유모가 찾아오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빗길에 원하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차를 끌고, 이른 아침 메리 포핀스가 찾아와 주었다.

그녀의 펼친 우산을 타고 하늘을 날기 시작하자 비를 쏟던 먹빛 하늘은 어느새 하얀 구름길을 펼치고 빛나기 시작한다. 뜻하지 않은 곳으로 선물처럼 메리 포핀스는 나를 데려다주었다.


여름의 세계다.

조잘조잘 숲 속의 바람이, 흐르는 계곡의 물이, 아이들이, 그리고 잠시라도 아이로 돌아가고픈 어른 아이들이 쉼 없이 웃어가며 이야기를 쏟아낸다. 메리 포핀스의 십년지기 친구들이 그녀의 마법을 통해 내게도 십년지기처럼 다가오는 순간이다.


고향을 떠난 십 대 이후 처음 들어서 보는 옛 그대로의 농가다. 멀리 보이는 산과 펼쳐진 논밭, 텃밭엔 깻잎과 오이 등이 자라고 마당 옆엔, 이젠 더 이상 뚜껑을 열고 닫을 사람이 없음을 알지 못하는 독들만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얼마 만에 아이들의 소리가 이 마당에 울려 퍼진 것일까? 마루 끝에 앉아 커져가는 그림자에 삼켜지는 것도 모른 채 물끄러미 먼산을 바라보고 앉아있었을 할아버지의 그리움이 내게로 스며든다.


그 집에 이렇게 서울로 떠난 손자의 지인들이 모여 불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흐르는 계곡물에 놀다 다슬기를 잡다 지칠 만도 하건만, 아이들은 한여름의 꽃인 냥 활짝 펴 잠들 줄 모르고 어른들 또한 아가씨가 애 엄마가 되도록 함께한 세월을 무기로 마음과 마음을 넘나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것들에 마음에 시려온다.

어찌 보면 어디에서 든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다. 숯불에 굽는 고기와 텃밭에서 급조한 야채, 술을 건네며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 더하여 여름날에 밤바람은 얼마나 달콤하던가?


지난 시간은 언제나 시리게 찾아온다. 낯익은 장면에 잊고 살던 것들은 문득 떠오르고, 그리움은 짙어져 아픔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빚 진자들의 도시!

여름은 그다지 즐겁지 않은 그들에게도 잠시 빼앗긴 시간을 돌려주는 계절이다. 그들의 기억을 훔쳐보며 낄낄거릴 속셈을 감춰두었다 해도, 기꺼이 마음을 풀어헤치고 즐거움 속으로 빠져든다.


생각해 보니 오랫동안 가져보지 못한 시간이었다. 어찌 보면 겉도는 여행자로 마음속에 담가 둔, 도려내지 못한 그리운 장면인지도 모르겠다. 런던의 거리가, 파리의 공원이 그 어디든 쓸쓸했던 이유가 이 정겨움이 없어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기 때문이리라.


술기운 때문일까? 겨우 모양만 갖춘 낡은 담벼락이 혀끝을 차는 듯 보였다. 뭐 그리 대단한 삶이라고, 이유를 불문하고 제 주제나 내 주제도 모르는 담벼락과 도 건배다.


술잔으로 웃음이 쏟아졌다. 언뜻언뜻 슬픔도 들어찬다. 함께 한 이들이 진정으로 털어내고픈 것들의 무게를 덜어내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언제 든 바가지를 씌우려 달려들듯 무게를 더할 뿐인 술이, 오늘은 그러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럴 수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별들이 정말 밤하늘에 떠있다. 어느새 혼탁한 서울의 밤하늘에 익어 이렇게 밤하늘이 까만지 잊고 살았던 것이다. 기쁨을 주물러 별을 만들 수 있다면 메리 포핀스에게 달아 놓을 것이다. 별이 그녀가 내 곁으로 올 때마다 루돌프의 코처럼 환하게 길을 밝혔으면 해서다.


메리 포핀스!

그러고 보면 어른아이에게 더 필요한 유모인지 모르겠다. 번거로움이 싫어서, 또는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놀이를 잃은, 그러다 보니 필요 없는 외로움만 온전히 차지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어쩌면 그녀는 즐거움을 찾아주는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놀이야 당연하겠지만 왜 유모는 붉은 뺨을 가지고 있어야 했을까?

진정으로 즐거움을 아는 사람만이 뛰어노는 아이들처럼 붉은 뺨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메리 포핀스가 그렇다.


서울에 밤은 언제나 추운가 보다. 오늘도 겹겹이 옷을 껴입어 그런지 별은 보이지 않는다.


메리 포핀스 덕분에 뜻밖의 하루가 한동안 지쳐 안쓰럽던 나를 쓰다듬어주는 날이 되었다. 슬그머니 꺼이꺼이 울고 있을 허깨비처럼 사라진 젊은 날의 감정들은 농가의 빈 독에 묻어 두고, 한동안 버티기 좋을 정겨움만 담아와 그런지 잔잔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벌써 별이 보고 싶어 진다.

오늘 난 밤하늘에 별이 빛나는 곳, 여름이 쏟아지는 곳을 다녀왔다. 이른 아침부터 나의 메리 포핀스가 찾아와 주었기 때문이다.


- 그중 하나 슬픈 그녀가 행복해 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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