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비

by 여름나무

지나지 않는 것이 있을까?

가 지나고 바람도 지난, 여름이 지나는 하늘 길이 참 곱다. 둥실둥실 하늘에 떠다니는 저 구름처럼 산다면, 뜬금없는 생각에 웃음이 피었다. 인생도 기쁨 속에 때론 할퀴고 무너지고 상처를 내어준 길이지만 남은 길만은 저리 고왔으면 싶어 진다.


뿔난 계집애처럼 따갑게 쏘아되던 여름빛이 어느새 살며시 가을을 품은 듯 부드러워진 느낌이다. 이제 여자가 되나 보다. 수국처럼 피었다 구절초처럼 하얗게, 연분홍 꽃으로 피었다 연보라 빛으로 물들었으면 좋겠다 생각이 된다.

몇 날이 지나는지 따져 물을 필요가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하루가 참 쉽게 간다고 해야 할지, 멈춘 하루라고 해야 할지 대답도 찾지 못한 채, 수상스럽게 시작한 한 해가 연거푸 산 넘어 산이니,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아깝지 않은 시절이 있을까마는 올해처럼 안타깝게 지나는 시절은 없을 것이다. 하여 기억할 것 없는 일 년이 될까 두렵고, 소중한 이웃이 아플까 무섭고, 남은 계절마저 이리 보낼까 더욱 서러워진다.

그래서일까?

훗날 그립고 아쉬워 붙잡고 울어야 할 것 마저 남지 않는다면 어쩌나 싶어 애써 미워할 것이라도 잡아둬야지 하는 마음이 앞서는 오늘이다.


꼬박 삼일, 공짜라면 양잿물이라도 삼키려 한다더니 그 짝이 났다. 한 달간 무료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말에 그저 평소 재밌어하는 중국 영화 몇 편 본다는 게, 정작 60회 차의 드라마를 보느라 커피를 탕약 마시듯 하며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를 시간을 보냈다.


비몽사몽, 혼탁한 시간을 벗어나자 터널을 벗어난 듯 하루가 가볍고 밝게, 선명히 다가선다. 잠시, 세상 모든 일들이 그러했으면 좋겠다 소망해보지만 지나칠 욕심일 터였다.


사람이 참 어이없게 마음을 여는 경우가 있다. 잠시 꿈을 꾸었나 싶게, 비록 허구 속 세상 이야기지만 타인의 삶을 통해 알게 되는 것들이 그러하다.


물이 흐르듯 고이고 넘치는, 또 거세지다 잠잠히 멈추는, 흘러든 물인지 고였던 물인지 여전히 물인, 사람에 삶도 그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가끔 매체를 통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며 배우는 것들이 있다. 그중, 올해 102세 노교수님의 말씀은 내게 좋은 이웃과 시원스러운 수박을 나눠 먹듯 나누고 싶은 이야기로 다가선다.


“혼자 남게 해서 미안해” 하며 세상을 먼저 뜬 친구분들의 말씀을 전해주는 쓸쓸함이,

‘살아보니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남은 사람이 가장 슬프다’는 말속에 든, 외로움이 가슴을 아리게 하였다.

하면서도, ‘내가 하는 일 때문에 행복한가?’ 묻는,


'내가 나를 믿고 살 수 있는 나이가, 그게 철든 나이라 하시는', 말씀이 잔잔히 다가와 내게 고스란히 스며든다.


아직도 많은 것들이, 사소한 것조차 내게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다. 언제나 스스로 답을 갖고 살면서도 밖으로 나가 답을 찾으려 애를 쓰는 모양새가 그러할 것이다.


사실 삶이란,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기다리는 자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이를. 허기의 해결을, 결핍의 채움을, 욕심이 채워지기를, 재미진 일이 생기기를, 죽음에 그 순간까지 행복해지기를 기다리고 마는, 그것이 사람의 속내일 것이다.


이 모든 기다림을 내려놓고 평온한 하루가 되어 감사하게 되기를,

괜한 잣대를 들이밀어 평범한 날의 행복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결국 또 기다림을 시작하는 건가?


- 여름 비


지나는 길이었다

무심코 던진 눈길이 치이고 받치는 네거리에

저만치 걸음을 내딛는 너와

어쩌지 못할 내가 만났다.


툭 치고 떨어지다

후드득 쏟아지고 마는

그리 내딛고 돌아서는 너도

네거리 모퉁이에 기대선 나도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보지만

결국 떠나는 여름을 울리고 말았다.

이별은 언제나 그렇듯 슬프다.

연연하지 말아야 할 것에

스스로 목메어 사는 세상

그리 떨구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어디고 내던져 버려야 할

가져가지 못할 여름날의 기억,

별이 되어 쏟아지는 순간이다.


왜 별들은 울지 않을 거라 생각을 하며 살아왔을까?

처음 알았다

별들도

한낮에

비가 되어

작정이라도 한 듯

꾹꾹 참아두었던 눈물을 쏟아낼 수 있다는 것을,

온통 별이다

떼어놓는 걸음마다 별들이 와 닿는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별이 되었을까?

시리도록 차가운 밤하늘에 잠겨

애써 태연한 척 눈물을 감추려

여전히 깜박거리며 빛나고 있음을,

온통 별천지다

달음박질쳐 내 속으로 숨어든 언어들

한꺼번에 몰아쳐 이렇게 쏟아져 내리나 보다.


발끝에라도 와닿는

이렇게라도 와 닿고 싶은

쏟아지는 그리움에 언어들.


쏟아진 별들을 밟으며 길을 걷는다

간간히 소리 내어 웃는 듯 부서지는 별들의 속삭임

그리움으로 허기를 채우며

빗 속으로 숨어 지나는 여름처럼

여름 비로 내가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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