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뻑끔뻑 눈을 뜬다.
세상이 그지없이 고요하다. 그리 분주하게 움직이던 차들의 행렬이, 언제나 급급해 서둘러대던 기류가 잠시 멈춰서 있는 걸 보니, 명절 연휴에 도시를 뒤덮고 있는 회색빛 하늘도 늦잠에 빠졌나 보다.
어쩔 수없이 맞닥뜨리는 것, 어쩌다 보니 명절도 그러한 것 중 하나가 되었다. 자의든 타의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거나 남아있는 사람이 되어 양가적 감정에 쌓여 갈등을 겪게 되는 몇 날인 것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명절을 맞이하는 우리의 태도는 이리 싱겁지 않았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도 한몫 거들었겠지만, 이젠 긴 연휴(개별적 여행을 떠나는)란 것이 앞서는 것 같아 소중한 것을 하나 더 잃어버리는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이 먹먹해진다.
요즘에야 지친 도시 생활을 접고 귀농을 해 터를 잡는 사람들이 제법 보이지만, 예전에야 이유에 무엇을 두었든 결국은 좋은 밥벌이를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던 터였다. 그래 명절은 그 고유의 의미보다 도시로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잠시 고향으로 돌아와 잠깐이라도 고향의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여자라면 그럴 수 있듯이, 제발 명절만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며 투정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누가 일을 더 하고 덜하고 동서지간의 눈치작전부터 시작해 하루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은 잔머리에, 누구의 꼼수는 먹히고 안 먹히고 가 때론 부부싸움에 빌미를 제공하게도 되는,
정말 바람이란 건 삐진 듯 뒤돌아서야 달래줄 냥 찾아오는가 보았다. 그리 간절할 때는 외면하던 것이 심술궂게도 이젠 찾아뵈어야 할 부모님들이 계시지 않고 애들마저 여행을 떠나자 ‘꿈은 이루어진다’가 되어준다.
괜한 것으로 심사가 뒤틀리는, 욕심이 많아지는 날이 명절이기도 하다. 분분하게 장을 보는 가족의 모습이,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시댁을 방문하는 듯해 보이는 신혼부부의 모습이 조금은 부러운, 무엇보다 유년의 얼굴이 그들의 부모를 닮아가며 지난 일들을 어제의 일처럼 나눌 수 있는 그들과 함께하지 못함이 매우 아쉽고 속상한 일로 다가섰다.
몹쓸 것이 미운 정이라고, 눈 앞에서야 네네 하며 속으로는 투덜거릴 대상이었던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좀 더 해드리지 못한 것에 마음 아파지는 것도 명절날이다. 모처럼 다 모인 자식들 앞에서 연신 웃음을 흘리며 그리 좋아하시던 모습이, 시장바닥의 생선 위에도, 늘어진 과일마다 둥둥 떠다녀 결국 추억을 장바구니에 담고 만다.
그분과 함께 순댓국을 먹었던 식당, 머리를 다듬었던 미용실, 목욕탕 의자에 겨우 걸쳐야 했던 앙상한 엉덩이 뼈 사이로 숭숭 드나들던 바람이, 허허벌판에 지나는 삭풍처럼 아린 그리움의 시간이었던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건만,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을 한숨 하나로 몰아 내쉬는 게 할 수 있는 전부다.
명절이면 북적대는 귀향길에 힘듦을 호소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은 자의 외로움보다 크지 않을 거라 단정을 짓고 만다. 미우나 고우나 가족과 함께 하는 것만큼 힘이 되는 건 없다는 생각에서다.
어찌 됐든. 이참에 홀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잘 보내느냐 하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혼잣말이라도 뱉어가며 자신과의 만남을 가져보던지, 감정이 흐르는 대로 늘어져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란 생각을 한다.
“하쿠나 마타타”
이런 날에 딱 맞는, 즐거운 주문이라도 외우듯 ‘라이언 킹’ 영화와 기분 좋은 만남을 갖는다.
“봐 사자가 우리 편이 되는 건 그리 나쁜 생각이 아니라고”,
탈진하여 쓰러진 ‘심바’를 구하는 '티몬과 품바'의 뻔한 계산법에, 그런 사람 하나 키우면 고루고루 든든할 거란, 뒤따른 생각에 엉큼한 미소가 피어난다.
“난 먹이가 아냐”
새로운 삶은 식성도 바꿔야 할 만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결코 가볍지 않은 영화임을, 막상 필요할 때는 멋모르고 넘어가면서 괜한 곳에선 발달된 눈치가 미워지는 순간이다.
‘과거는 지난 일이라 못 돌리고, 미래를 바꾸려면 과거를 잊어야 한다’는, 웃음 속에 숨은 진실이 방심하고 풀어헤쳤던 가슴을 날카롭게 찔러 응급수혈이라도 받아야 할 참이다.
‘세상이 네게 등을 돌리면 너도 등을 돌리면 된다’는 세상 편하다는 그들의 철학이 도대체 끝이 어디일지, 세파에 찌든 노인네의 거친 손바닥처럼 후려친다. 숨겨둔 상처가 아파진다.
순환과 직선!
영화가 진정으로 전해주고 싶은 말일 게다.
‘삶이 아무 의미 없이 이어지는 직선이며 그 끝을 향해가는 것임을, 그러다 끝에 이르면 죽고 사라진다.’는 티몬의 얘기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고 싶지만, ‘자연은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생명의 순환 속에서 네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라피키의 말에 무릎을 꿇고 만다. 우리가 자연의 신비로운 힘 앞에 겸허해야 할 이유가 거기 있는 것이다.
털갈이 털 하나를 새가 물어가다 놓쳐 기린이 먹고, 똥으로 나와 쇠똥구리가 데굴데굴, 깨진 틈에 바람을 타고 날아가 벌레들에게서 라피키의 손에 닿기까지, 결코 혼자 사는 게 인생의 전부일 수 없는 순환에 고리, 이어 짐이다.
사실 ‘삶은 공평하지 않아’ 하는 스카의 말이 모두 틀렸다고는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의 행동이 무엇인가에 영향을 주고 또 그 영향을 받아 그리 순환되고 있음을 빼놓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참, 참, 참이다. 다시 한번 영화를 돌려보며 나와의 접목을 시도한다. 지질함이 새삼스럽지도 않다. 어쩔까? 잠시 잠깐 지나치는 삶의 전경에, 이제 와 못난 나를 탓하며 울 수만도 없고, 잠언집에서나 나올 듯한 말들로 자위할 수밖에,
‘늦었다. 생각하는 지금이 시작하기 가장 좋은 때라고,’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데, 무파사가 대답을 해준다.
"네 을 들여다보렴,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존재란다"
" 너만이 진정한 왕이다. 네가 누군지를 기억하라."
이만하면 잘 보낸 명절 연휴가 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악순환이 아닌, 선순환적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또 이런 것들이 없다면 과연 우리의 삶이 무슨 재미가 있겠나 싶다.
만약, 아리스토텔레스가 삶의 목표를 행복이 아닌 즐거움으로 규정했다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그러면 나는 칸트를 찾아가 지족선사로 꾄 황진이에 도전장을 내밀지도. 하 하 하 뭉개고 또 뭉개는 날이 돼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