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하시길 권합니다.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지내지 마십시오. 이 가을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일기일회, 생애 단 한 번뿐인 가을입니다. 누구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이 삶입니다. 이 가을날, 그저 대상만 보고 즐길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도 샘솟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합니다(법정).
무심한 듯해도 그냥 흐르는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책 한 권을 집어 들어도, 스치듯 지나는 타인도 언젠가 한 번쯤 있었던 일처럼 다가와 재연되는 느낌인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이 가 닿아서 그렇겠지요. 연이란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직장에 집안일에, 산다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대충대충 훑어보고 꽂아두었던 책을, 마음에 작은 돌멩이 하나 던져진 듯 가을에 물결이 동그랗게 점점 크게 퍼지는 날에 다시 집어 들어 만나게 되니, 이 또한 마음에 결이 다가가 그러하겠지요.
법정스님의 은사님이기도 하신 효봉스님이, 승려가 되기 전 석두스님을 찾아가 처음으로 나눈 대화로부터 함께하고자 합니다.
석두스님이 묻습니다.
“어디서 왔는가?”
효봉스님은 신계사에서 왔다 답을 합니다.
“그럼 몇 걸음에 왔느냐?”
효봉스님은 큰 방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답합니다.
“이렇게 왔습니다.”
법정스님의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이곳에 몇 걸음에 왔습니까?”
에이고, 한참을 생각해봐도 굽이굽이 돌아서 왔다고 답 할 수밖에요. 그 길이 평상심을 찾는 길이라면 또 굽이굽이 더 돌고 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구나 양질의 토지에 농사짓기를 원하였을 것이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을 터, 그래 누군가는 척박한 땅을 개간해 양질의 옥토를 만드는 작업도 해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법문집을 읽어가며 어느새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아가는 나를 만나게 됩니다. 종교학자들이 불교를 가리켜 ‘물음의 종교’라 하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아갈 것 같습니다.
그 많은 길을 두고 내가 왜 이 길을 선택했는가? 하는 의문이 화두가 되어야 한다는, 한 번 들르겠다 지나는 말에 싹 틔워, 운문사에 들러 출가 수행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와 닿습니다. 출가자들은 몇 생을 그렇게 익혔기 때문에 자기 길을 찾아 나선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에 내 삶은, 삶에 길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스스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정한 듯 정해지지 않는 흐름에 이끌려 살아간다 생각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결국 무심코 했던 행동 하나하나의 결과가 필연처럼 내 삶을 이끌었다 생각되는 것이겠지요. 사람 사는 세상이 하나의 메아리와 같다는 말씀이 가슴으로 들어와 큰북처럼 울림을 합니다.
누군가 스님에게 물었답니다. “중노릇하는 데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고?”
가장 힘든 일이 있다면 복잡 미묘한 인간관계라 선뜻 답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네요. 스님도 그러하시다니 저야 오죽하겠습니까? 저 또한 고민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관계가 서툴러 마음 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 최선의 방어책으로 관계 맺기보다는 거리두기를 선택해 안주하고 맙니다. 인간관계를 통해 현재의 자신을 확인할 수 있다 하는데, 빗장 걸어둔 상태를 고수하고 있으니 사람이 무르익어 가기엔 턱없이 부족할 거 같습니다.
인간은 홀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어울려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만나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관계 속에서 거듭거듭 형성되는 것이 인간이지요.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과 어울리면 도박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술꾼과 어울리면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사람과 가까이하면 지혜를 얻게 되겠지요.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꼭 제게 하시는 말씀 같아 움찔합니다. 설마, 그럴 리가? 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사실보다 서고 싶은 방향으로 기우러 살아왔음을 어찌해야 할지?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며 마음을 달래도 될까요?
여럿이 어울려 사는 세상이니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말고 남의 처지를 살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웃과 관계를 고려하여 그 속에서 자신을 찾고 닦아야 합니다. 세상 모든 존재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게지요. 독립되어 홀로 존재하는 개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부모가 있어 자식이 존재하고 자식이 짝을 이루어 후세를 낳습니다. 나무가 없으면 무엇도 살 수 없듯이 우리가 어떻게 숨을 쉬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어느 한 가지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모두 있을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이 자리인가 되묻는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굴레를 벗어나 좀 더 나은 것을 누리며 살았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원망스럽거나 힘겨울 땐 팔잔가 보다며 없던 종교를 들춰 얻어들은 말들을 다 갖다 붙여 보기도 하지만, 서서히 알게 되는 것이 어디에 있든 자기 스스로 아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중한 내가 소중한 타인과 이어져 사는 세상, 순간순간 어떤 마음을 지니고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법구경 첫머리에 ‘모든 것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물건을 대하며, 어떤 일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온전한 마음을 쓰고 있는지, 잘못 쓰고 있는지, 수시로 주시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하지만 제 마음은 왜 그리 오락가락하는지, 섣불리 달려들다가도 아차 싶어 멈추고, 나 몰라라 하다가도 불처럼 달려들어 활활 타 버리고 마니, 스님 말씀에 그 마음을 내보이기가 영 부끄러워집니다. 분명 마음을 제대로 쓸 줄 알아야 할 것인데 말이죠.
생각과 말과 행동은 우리 정신에 깊은 자국을 남깁니다. 그것은 마음 밭에 뿌리는 씨앗과 같아서 이다음에 반드시 그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우리는 매 순간 끝없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어떤 나를 만들 것인가는 나 자신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곧 업이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와 같은 씨앗이 뿌려지는 것입니다. 그 씨앗이 어떤 상황을 만나면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낳습니다. 업의 놀음에 이끌려 가지 말고 순간순간 새로운 자신을 만들기 바랍니다.
맺힌 마음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된다는 말은 가장 두려운 말이기도 합니다. 이 생에 풀지 못하면 어느 생이고 풀어야 한다니, 감히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 해탈하고픈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사소한 것에도 문 닫고 돌아앉으니 달마 스님의 법문(관심론)의 일부로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적어봅니다.
“마음, 마음이여, 알 수가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 없구나”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일들은 인과관계의 고리로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인과의 고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입니다. 불필요한 것들에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하지 마세요. 될 수 있는 한 적게 먹고, 적게 갖고, 적게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모든 것이 잠깐입니다.
엊그제 같은데 그해에 절밥만 먹고 벌써 50년이 흘렀다며, “내가 그동안 무엇을 했지?” 하십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입니다. 그 시간 속에서 특별한 무엇이 있을까 욕심을 부려봤지만, 또 별다른 것도 없는가 봅니다. 하지만 같은 시간을 어떻게 채우는가의 차이는 분명하겠지요. 매 순간을 충만하게 보내고 ’ 내 참 잘 살아왔네 ‘, 하면야 좋으련만 새벽녘에 문득 잠 깨어 덧없다 싶은 생각을 하게 되니, 더 늙어 허망하지 않고, 한탄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일들이 있겠지만, 결국 원망하고 미워하며 그러한 것들에 갇혀 세월을 흘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얽히고설켜 맺어지는 것들에 힘들어하고 맙니다. 속인이 어디까지 스님 흉내를 낼 수 있을까 마는 충실하게 삶의 질서를 가지고 살아야겠다 다짐을 하게 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 관리를 엄격히 하라는 스님의 말씀을 명심, 또 명심해야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삶의 과제가 주어져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앓는 일로, 누구에게는 재산적 손해로, 또 누구에게는 정신적 갈등으로, 그것을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존재에 깊은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왜 나에게 이런 문제가 닥쳤는가?’ 그것을 화두 삼아야 합니다. 자기 삶의 과정이라 생각해야 한다지만, 매우 어렵습니다.
인생의 길은 저마다 자기 자신이 걸어가야 합니다. 누구도 대신 가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미워하며,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이곳에 진리가 있습니다. 괴롭고 참기 어려웠던 일들도 지나고 보면 그때 그곳에 나름에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또 무엇을 위해 왔는가? 이런 물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해보지만 결국 제자리인 걸 느낄 때가 많습니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옵니다. 하나의 씨앗이 땅에 묻혀서 꽃피고 열매 맺기까지는 사계절의 순환이 필요하듯이, 사람이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기다림과 그리움이 동반됩니다. 뜻대로 되지 않아 불행해하지 마시기를요.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말씀을 새기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교는 ‘친절’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불교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친절한 마음’이 곧 불교라 말씀을 하셨답니다. 작은 친절과 따뜻한 몇 마디 말이 지구를 행복하게 하고, 지구 안에 사는 모든 존재들이 그 행복감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거창한 곳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 둘레의 사소한 것으로부터 더없이 행복해질 수 있다 하니 실천을 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나 행복을 바라고 있습니다. 행복의 비결은 적은 것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아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몫이 있습니다. 남의 것을 가로채거나 남의 자리를 흉내 낼 수없습니다. 자기가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를 정확히 알고 그것에 맞게 채워야지, 욕망이 지나치면 넘칩니다. 넘치면 자기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물질이 아닌, 마음의 평화, 즉 정신적인데 있습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주시지 하는 욕심은 내려놓기 힘드네요.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팍팍하고 어려운 경제에 정서가 메말라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보면 어디든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우리 집에도 있습니다.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가꾸어야 합니다. 자기 삶을 가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 만큼 살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반드시 찾아옵니다. 내려놓는 일부터 미리 연습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얼마큼 더 살아야 그리될지 저도 궁금해집니다.
성숙해져야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인다 합니다. 그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림없다 생각이 되지만 나이는 들어가나 봅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들리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다가오네요. 관심을 두는 것도 방향을 틀어가며 가을처럼 옅어집니다. 마음이 혼탁해질 때 이렇게 마음에 의지처를 만나듯 법문집을 읽게 된 것이 큰 축복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라도 삶을 점검한다면 사는 날이 보다 단순하게 행복해질 것 같습니다. 삶의 중심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음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받아들이니 덜 슬퍼집니다. 또한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참 많다 생각됩니다. 조금 유연하게 시작하고 싶어 아침마다 침대에서 5분 정도 스트레칭을 하고 일어서는데, 오늘은 희미한 어둠 속에서 보이는 발가락 열 개의 끝이 너무나 예뻐 보입니다. 마음도 이렇게 법문집을 읽으며 스트레칭을 해 유연 해지는 기분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