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에

by 여름나무

우울의 바다에 빠졌다.

출근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지만, 계략을 바꿔 잠 못 들어 뒤척이는 시간을 해묵은 영화라도 보다 자연스럽게 잠들기로 하였다. 그리 잠들었음이 분명할 것인데, 눈을 뜨고 보니 바닷물에 잠길 듯 말 듯 한 매트리스 위에 누워, 그것도 망망대해에 겨우 떠 있는 것이다. 아직 꿈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찰랑찰랑 물결이 다가와 몸을 치고 달아나다 또다시 치고 달아남을 반복한다. 아마 해가 뜨고 이대로 몇 날, 며칠이 지난다면 덕장에서 해풍에 잘 마른 황태처럼 꼬들꼬들 맛이 들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오래전 어느 영화에서 바닷속을 헤엄치는 여배우의 영혼이 몹시도 자유로워 보여 배워둔, 수영 실력으로 해안가까지 가닿을 수 있을 거란 상상은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찌해야 할까?

일어날까? 아니면 십 분만 더 자고 일어날까? 그러다 툭 염세적이고 허무주의적 감정에 빠지고 만다. 산다는 것이 참 귀찮다 생각되었다. 왜 눈을 떠야 하는지, 똑같은 매일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지루하다 못해 무의미하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또 먹고 자고, 그리 생각하니 산다는 건 전혀 행복한 일이 아니었다.


옷처럼 필요성에 따라 갈아입을 수 있는 변화하는 삶이라면 좀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긴 취향에 딱 맞는 옷을 골라내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맘에 들면 너무 크거나 작았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니, 매한가지로 자유로운 삶도 할인 기간을 기다리듯 퇴직 후로 미뤄두며 사는 내가, 변화 거리를 찾으며 매일 다른 날을 살아낸다는 건 오히려 불편한 일이 될지 모른다.


마냥 누워만 있을 수도 없고 벌떡 일어나기도 싫은, 이래저래 어느 쪽도 마땅치 않은 월요일 아침은, 정말 멀쩡하려 해도 멀쩡할 수 없는 날인가 보았다. 세상 모든 불행을 껴안은 듯 슬퍼지는 것이다.


어쩌란 말인가? 에이고 하나님, 부처님 찾을 수도 없고 참 답도 없는, 무엇을 위해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지 의미를 놓친 게 분명하다. 회피성 귀차니즘으로 다 내려놓고 티브이에 나오는 ‘나는 자연인으로 산다’에 자연인처럼 어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생각은 생각일 뿐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여행자가 되어 일주일만 머물러도 시설 편한 도시로 도망가고자 온갖 핑곗거리를 찾기에 바쁠 것이다.


헛꿈이라도 쉽게, 두루두루 조상님 덕분에 부모 덕이라도 있어 직업 삼아 돈 쓰는 게 일이면 좋겠다 싶어 진다. 어쩌다 내 부모님은 독립운동가의 후손도 아니면서 그리 약지 못해 빈곤하여 물려줄 것이 없었는지, 그 답답함을 닮은 나 또한 답답한 지 오래되니 뭐라 말도 못 하고 허허 웃고 만다. 도진개진이다.


그러면 퇴근길에 로또복권이라도 하나 사야 하나? 역사적으로 의미가 많은 숫자로 우선 40을 쓰고, 또 행운에 7과 죽음에 4가 들어가야 하겠고 또? 12월 12일이 생일이니, 12와 24를 넣고 수비학적으로 6을 써봐야 하겠다. 일등이 되면 우선 변두리에 작은 건물을 하나 살 것이다. 월세를 받으며 남은 생은 돈 쓰는 직업인이 되는 것이다. 세를 조금 깎아 주더라도 일 층엔 밤 낮 없이 가서 놀 수 있는 북카페를 두고 한 달에 한두 번 재즈 공연 등 작은 행사하기를 반드시 계약에 넣어 둘 것이다.


에고, 이러다 아침부터 뜀박질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뭐 하는 짓인지? 지나친 욕심을 내는 건가? 뻔히 바닥이 들여다 보이는 이 얕은 짓을, 그저 독백처럼 쏟아놓던 말들이라도 내게 유독 야박하다 싶은 하나님, 부처님, 그리고 나의 수호신님이 듣기를 은근히 바라며 키득키득 웃어본다. 어찌 보면 산다는 건 까치발을 들고 살금살금 또는 겨우겨우 종착지를 향해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현상 너머의 세계엔 빛깔도 소리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거의 비어있는 세계라 하지 않던가? 아니면 진리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다고 말한 소크라테스도 영혼 불멸을 믿었고 영혼은 윤회를 한다 생각했으니, 그를 굳게 믿고 이생은 공덕을 쌓아 다음 생엔 일국의 공주나 김태희급으로 환생케 해달라 빌어보는 편이 행복에 더 가까워지는 속 편한 길이 될지도 모를 것이다.


분명 지난 이틀은 너무나 행복했다. 특별히 부러울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없이 평안함이 나를 감싸고 웃음이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왜 월요일 아침은 삶이 이토록 괴로워지는 것일까? 딸 마저 출근하기 싫다며 늦장을 부리니 어찌하든 우울에 바다를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안아서 화장실로 데려주라는 딸의 말에 겨우 허벅지 하나에 끙끙거려 웃음을 토하고 만다. 도시락 준비로 마늘을 듬뿍 넣어 새우를 볶는 딸에게 “밥 먹다 귀가 갑자기 사람 귀로 변하면 어쩌지?” 물으며 덤으로 “갑자기 코가 사람 코로 변하면 다들 놀라는 거 아냐” 물어준다.


한자리에서 밥을 먹던 곰에 귀가 갑자기 사람 귀가 된다면, 사람 코가 돋아난다면 꽤나 웃기고 놀라울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웃음 참아내기가 쉽지 않다. 평소 곰 같은 딸이라며 사람 되려면 마늘을 많이 먹으라며 놀리던 놀이에 연장이, 엄마의 표정이 더 얄밉다는 딸의 투정이 어느새 우울을 걷어내고 육지에 가만히 나를 내려놓는다.


문득, 애착 담요를 놓지 못하는 아이처럼 지난 이틀의 행복을 놓고 싶지 않아 떼를 쓰는 어른아이 같았구나 싶었다.


전선 위의 까치가 요란스럽다. 저 울음이 제 영역을 주장하는 소리란 것을 알게 됐지만 그리만 믿고 싶지 않은 마음이 엉뚱한 해석을 하고 만다. 높은 곳에서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으니 누구보다 빨리 이상 조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오늘은 소식 없던 친구에게서 잘살고 있단 전화라도 오겠거니 기다려봐야 하겠다.


행복을 유지하려면 계속 쳇바퀴를 굴려야 한다는 ‘쾌락의 쳇바퀴’라는 개념이 있다. 행복한 일이 생겨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 또 다른 것을 욕망하게 된다는 뜻이다. 로또가 되어도, 비싼 차나 집을 샀어도 시간이 지나면 여기에 익숙해지고 결국엔 기본적인 행복 수준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단순한 것이 최선이다’라는 말을 신줏단지 모시듯 모시며 사는 게 현명할지 모르겠다.


문밖을 나서자 삶이 다가섰다. 사람이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야 한다는 할머니 말씀이 옳았다. 모든 것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이방인처럼 타인을 바라보거나 뒤섞여 다시 시작되는 날에 적응이 되는 것이다.


마음이 누그러진다. 마음이 통했을까? 맞은편 자리에 앉은 아이가 바라보던 눈빛이 마주치자 선물처럼 와르르 웃음을 쏟아준다. 숱한 욕심도 필요가 없어지는 순간이다. 퇴근길엔 둘레길을 걸으며 한참 물들어가는 가을 길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해질 것이다. 그러고 보니 특렬하게 욕심을 내지 않아 삶은 그리 험악하지 않았고, 단순해 기뻤으며, 무지하여 뭘 바래야 할지 몰라 성남이 적었던 삶이지 싶다. 다시 금요일 오후는 찾아올 것이다. 딸과 콩이와 콩닥콩닥 행복한 이틀도 금세 지나갈 것이다. 아무렴 어쩌랴, 다람쥐 쳇바퀴 돌고 도는 삶이라도 내일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의 마지막 대사가 그러했던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그 햇빛 아래 나는 씩씩하게 매일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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