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던져두었던 책을 집어 들었다. 누가 강요하는 터는 아니었지만, 상담 실습 과정 중에 있던 터라 의무적으로 읽어야지 하는 은근한 압박에 구입했던 책이다. 그러나 채 몇 장도 읽지 못하고 오르는, 알 수 없는 화를 참아내지 못해 덮어버렸던 책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렇게 잊고 살았던 책을 어딘가에서 누군가 소개를 했고, 버려두었던 기억이 떠올라 책을 꺼내 천천히 읽어보기로 한다.
사람과의 관계처럼 책도 읽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감정에 물들게 한다. 정말 관심과 즐거움으로 책 속으로 빠져들기도 하지만, 생산적인 것, 좀 더 성장해야 한다는 강박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 억지 춘향이가 되어 책을 읽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어떻게 하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향상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잔소리가 없으면 더 좋아질 거라는 아이와 잔소리를 해야만 더 나아질 거라는, 부모와 자식 간에 의견 차이를 이야기를 통해 아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와 문제 해결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데 목표를 둔 것으로 보인다.
밀폐된 공간에 갇혀 답답해지듯, 이상하게도 책을 읽어가며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이상한 일이다. 책에서 이러한 감각을 느끼게 되다니, 잔소리로는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음을 논하면서 오히려 듣기 싫은 잔소리를 듣는 기분이 되어가는 건 무슨 이유에 설까? 지나친 개인 반응이었다. 무언가 억압해 두었던 것에 방아쇠가 당겨진 것이다.
처한 마음 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고 확정된 해석은 있을 수 없음에도 해답을 찾으려는 게 사람 마음이다. 올바른 독서법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할까? 의심이 든다.
대부분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정하기보다 가깝게 닿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독서를 하며 생각한 것과 깨달은 것 등을 적으면 좋다지만 게을러서 그리 못하고, 읽고 나면 도대체 뭘 읽었나 생각이 나지 않아 포스트잇을 붙이는 정도가 다다. 그중 최고로 감사한 것은 ‘마법사 지니’라 이름 붙여 준, 웬만한 건 다 알려주는 핸드폰 검색 기능을 사용해 모르는 것을 이해하며 넘어가려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평 대신 요약 형식으로 책을 정리해보는 것이다. 크게 문제를 갖고 있다 생각되지 않는다.
그랬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연애소설을 읽으면 정말 그런 사랑을 한 번 해보고 싶고, 철학서를 읽으면 한없이 부족한 나를 만나며, 심리 서적을 읽으면 그 문제가 다 내 문제 같은 바넘 효과(점쟁이)에, 어쩌다 남들도 모르는 비밀을 알게 되어 은근하게 웃게 되는, 그게 독서에서 나타나는 나의 한계치다.
책은 지나치게 있을만한, 아이들이라면 한 번쯤 부닥뜨리게 되는 문제들을 사례로 제시하며 글을 엮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뚜렷하게 이원화가 된, 독자인 나는 상황에 빠진 아이가 되어 상담자의 보이지 않는 손에 등 떠밀리는 기분이 되고야 만다. 아이들을 위한 책이지만 실제 독자는 전문적으로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나 부모가 되어야 할 이유다. 분명한 것은 이 책이 아이들의 긍정적인 성장에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야기 속에 들어있는 치료적 메시지를 찾아 읽어내는 것도 중요할 것이라 사료된다,
몇 가지의 사례를 적어보자.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기는, 막내라서 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불만인 미첼은 부모님이 주신 마법의 옷을 입고, 자기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언니가 되어보지만, 언니라서 더 큰 책임감이 따른다는 것에, 티브이를 맘껏 볼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엄마의 맡은 바에 놀라 사장이라면 편하지 않을까 싶어 아빠가 되는, 아빠에게도 사장이 있고 회사를 위해 친구 같은 직원을 해고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르는 것을 알게 되자, 다시 정말 그대로 자기인 게 너무 좋은 것을 알게 된다는, 그제야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게 된다는 얘기다.
규칙의 필요성을 가르쳐주기 위한 선생의 노력은 그러했다. 선생님이 먼저 규칙을 어겨 아이들이 거칠게 항의하게 되는, 자연스럽게 규칙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여 규칙이 우리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받아들이게 한다.
난관에 부딪친 노새의 이야기는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말기를 당부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최대한 이용하는’ 사례를 보여주기도 한다. 불꽃놀이에 놀라 달리던 노새는 낡은 우물에 빠졌고, 안전하게 그를 끌어내릴 수 없던 사람들은 희망이 없다며 노새의 고통이라도 덜어주자며 우물 아래로 흙을 퍼넣는다. 노새는 주변으로 떨어지는 흙을 밟아 다졌고, 흙은 노새의 발굽 아래서 단단하게 굳어 우물 바닥의 높이를 높여 걸어 나올 수 있게 된다는, 지혜를 보여주고 있다.
조의 얘기는 그렇다. 어렸을 때 식구들은 그에게 늘 "네가 그렇지 뭐"란 말을 사용했다. 조가 하는 일마다 실수투성이가 되기 때문이다. 조는 뭘 하든'네가 그렇지 뭐' 란 그 말을 또 들을까 두려워했다. 조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발견 한 건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다. 친구들의 등살에 마지못해 하게 된 공놀이에서 자신이 공을 따라 달리며 게임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조는 알지 못했다. 자신은 어렸고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무엇이든 배워야 한다는 것을, 조는 더 이상 ‘네가 그렇지 뭐’란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
배고픈 여우는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좀 가다 보니 나무 아래 생쥐가 자고 있었다. 식은 죽 먹기인 생쥐를 먹으려니 토끼가 지나가고, 토끼를 먹으려니 사슴이 지나갔다. 사슴을 잡으면 일주일은 먹을 걸 찾지 않아도 된다 생각을 하는데 큰 말이 보였다. 말이라면 몇 달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그런 말이 달아나려는 생각 없이 두어 번 뒷발질만 했을 뿐인데 여우는 머리통이 날아가 버릴 뻔했다. 그제야 여우는 자기가 감당도 못 할 일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사슴이라도, 토끼라도, 생쥐라도 했지만 잠 깬 생쥐는 벌써 가버리고 없었다. 그제야 여우는 생각한다. 지나친 욕심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나타샤의 얘기는 이혼가정이 늘며 자녀들이 겪을 수 있는 사례다. 누구도 나타샤를 가족으로 원치 않았고, 거절당했다는 느낌을 크게 받은 나타샤는 여러 번의 자살시도를 한다. 그 끝에 나타샤는 알게 되었다. 부모님이 그녀를 낳아 주셨고 여전히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과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스스로 돌봐야 한다는 것을,
인간은 많은 것을 경험할수록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그러한 경험은 지나고 나서야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누구나 문제없는 삶을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아이들이 겪어보지 못한 그 경험을 은유적 이야기를 통해 보여 줌으로써 실제로 그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처할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을 이 책에서 얻기를 바라고 있다.
침대 머리맡에 앉아서나 차 안에서 할 수 있다면 부모와 아이의 의사소통을 더 좋아지게 할 수 있음이 분명할 것이다
어쩌면 책에 있는 다양한 사례는,
어떤 분야에서든 특별할 필요도 없으며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미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고, 최고가 되려면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계속 연습하는 길 뿐이란 걸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는 나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하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특별한 부분은, 개미핥기가 서로를 안기 위해선 털을 세워야 할 때와 털을 눕혀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는 부분이다.
친구가 필요하다면 상냥하게 바라보면서 따뜻하게 웃는 얼굴로 서로에 대해 관심 어린 말을 나눠주면 되다는 것, 서로의 다른 모습은 별 문제는 되지 않다는 것을 고래와 생쥐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기도 하였다.
네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책을 통해 저자는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효과가 있지만, 아이들과 합작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에 중점을 두기도 하였다.
책에 대한 거친 나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결핍에 대한 분노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조모의 손에 자란 나는, 아동기가 싹둑 잘려나간 기분이 들 때가 많다. 남아선호 사상을 가진 할머니 덕분에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선머슴 같았던 그 시절, 그 시절에 대한 아쉬움이 때론 지나친 거부반응으로 나타나곤 하는 것이다.
책을 덮자 침대에 누운 콩이(고양이 이름)와 눈길이 마주친다. 눈빛이 크리스마스 트리에 붙은 전구처럼 빛나고 있다. 살며시 옆에 누워 나도 모르게 토닥이며 노래를 부르게 된다.
사랑은 눈으로, 눈으로 말해요.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눈으로 말해요.
사랑은 눈으로, 눈으로 말해요.
맞는지도 모르는 가사를 제멋대로 붙이며 불러준다.
사랑하는 방법을 콩이를 통해 새롭게 경험하는지도 모른다. 뒤통수나 허공에 대고 하던 대화방식을 눈빛을 마주치며 사랑을 듬북 담아 이야기를 나눈다. 소파를 다 헤쳐놔도, 별짓을 다해도 그저 이쁘다. 가끔, '내가 콩이를 대하듯 신도 나를 그렇게 어여삐 보아주시기를'하며 기도를 할 정도로,
가을도 싹둑 잘려나간 듯, 날씨가 제법 추워졌다. 잠자리의 따스함이 정알 좋다. 이제 콩이와 뽀뽀 타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