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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Sep 06. 2018

클래식, 꽃 피우다 <1>: 미르테



미르테 꽃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스)

미르테 꽃은, 새하얀 꽃잎 옆으로 반짝이는 초록 잎사귀가 달렸습니다. 예부터 서양에서는 이 꽃을 엮어 신부의 화관을 만들고, 신랑의 예복에 장식으로 꽂아주곤 했죠. 우리나라 꽃시장에서는 미르틀, 머틀, 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군요.


사전에서는 도금양과에 속하는 꽃으로 은매화, 라고 하네요. 도금양과의 나무는 지중해 연안에서 자생하는 상록관목입니다. 풍성한 가지를 거느리고, 일 년에 한 번, 여름에 꽃을 피우죠. 지름 2㎝ 정도로 작고 둥근 5장의 꽃잎과 꽃받침에, 풍성한 수술이 달립니다. 꽃만 아니라 가지와 나무도 향기로운 기름을 배고 있어서, 장식용 가구의 재료가 되거나, 잎과 꽃을 말려 포푸리로 쓰기도 합니다. 


미르테는 예로부터 평화와 사랑, 아름다움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고대 로마에는 비너스 상을 장식했고, 이집트에서는 사랑과 환희를 상징하는 꽃이었다고 하죠. 유럽에서는 다산과 순결의 상징으로 결혼식의 꽃다발에 널리 쓰였습니다. 




‘미르테’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잘 알려지게 된 건, 작곡가 슈만이 아내 클라라를 위해 만든 가곡집 <미르테의 꽃> 덕분입니다. 1840년 9월 12일,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과 피아니스트 클라라 비크는 고대하던 결혼식을 맞이했습니다. 슈만의 나이가 서른, 클라라는 스물한 살 생일을 하루 앞두고 있었죠. 지금은 세기의 로맨스로 유명해졌지만, 당시 두 사람의 결혼 과정은 치열하다 못해 처절했습니다. 슈만의 스승 프리드리히 비크의 딸, 클라라는 주목받는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저 연주만 하는 게 아니라 곡을 쓴 여성 작곡가였고, 많은 작곡가들의 곡을 초연하고 무대를 이끌며 오늘날 음악감독의 지위도 누렸던 인물입니다.


클라라 슈만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스)


그에 반해 클라라보다 아홉 살이 많은 슈만은, 법률가의 꿈을 버리고 뒤늦게 음악가의 길에 들어섰지만, 과격한 연습 탓에 손가락 부상을 당해 장래가 불투명했죠. 무엇보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우울한 기질 때문에도 꽃같이 키운 딸을 내줄 장인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로베르트 슈만(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스)

그럼에도 사랑에 빠진 슈만과 클라라 커플은 결혼을 반대하는 클라라의 아버지에게 결혼 청구 소송을 냅니다. 그리고 역으로 클라라의 모든 유산을 압수하는 소송을 당하죠. 지루한 법정 공방 끝에 커플은 결혼 허가를 받아냅니다. 




결혼식을 앞둔 하루 전 날, 지금 같으면 다음날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기 위해 숙면을 취해야 하는 중요한 날인데요, 슈만은 클라라에게 가곡집 악보를 선물했습니다. 바로 <미르테의 꽃 Op. 25> 이죠. 괴테, 뤼케르트, 바이런, 무어, 하이네, 번즈, 모젠의 시를 엮은 가사에 아름다운 선율과 피아노 반주가 붙은 스물여섯 곡의 가곡이 담겼어요. 



1곡 헌정(Widmung) 뤼케르트 시 
https://youtu.be/2NAu1mS2QsQ


남성의 목소리로 (바리톤이 불러서 이조됨) 

"그대는 나의 영혼, 나의 심장, 나의 축복, 나의 고통. 그대는 내가 깃들어 사는 나의 세계. 당신의 눈빛이 나를 변화시킬 때 내 삶은 그대의 사랑으로 가득 찹니다."



24곡 그대는 꽃처럼(Du bist wie eine Blume) 하이네 시 
https://youtu.be/YgueooEddPY


"당신은 한 송이 꽃과 같이, 자애롭고 아름답고 순결합니다. 그대를 바라보기만 하면, 이름 모를 슬픔으로 내 가슴 깊숙이 저려옵니다. 제 두 손을 당신의 머리 위에 얹습니다. 그리고 신이 당신을, 그렇게 자애롭고, 아름답고, 순결하게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고백을 받은 신부는, 분명 기쁘고 행복했겠죠... 어쩌면 감격스러운 만큼,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이겨내리라는 굳은 다짐을 되뇌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클라라가 슈만과의 결혼 이후에 닥친 많은 역경들을, 육아와 연주자로서의 삶을 병행하면서, 또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아이들을 돌보며 한결같이 삶을 가꿔나간 것처럼 말이에요. 그리고 남편의 작품을 연주하고 남편이 발굴한 신인 음악가를 후원하면서, 그렇게 그가 미처 살지 못한 시간들을 그녀가 살아갔습니다. 


  




미르테 꽃은 아름다운 만큼 향기롭기도 하지만, 실제로 가꾸기에는 섬세한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해가 너무 많이 들지 않는 반그늘을 좋아하고, 여름철에는 하루 한 번 물을 주는 게 좋다고 하네요. 겨울에는 실내로 들여야 합니다. 재미있는 건 나무의 모형을 가위로 다듬어주는 대로, 그 모양대로 자라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둥근 모양으로도, 아이스크림 막대처럼 길쭉한 모양으로도, 유럽의 정원에서처럼 깍둑썰기한 네모 모양으로도 기를 수 있다고 하네요.  


미르테 꽃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스)


두 사람이 만나 만들어가는 결혼이, 바로 이 꽃나무를 닮지 않았나요? 결혼에 이르는 짧은 과정보다 살아갈 더 먼 인생길에서 어떤 모습으로 빚어질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끊임없는 배려와 세심한 돌봄이 필요한 미르테 꽃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삶 곳곳을 채우는 음악 이야기 <음악다반사>, 음악으로 피운 첫 번째 꽃은, 미르테입니다. 







* 더 들어보기 : 클라라가 노래로 쓴 답장은 이 노래입니다.   


Clara Schumann, 세 개의 가곡, Op.12 중 '그는 폭풍우를 뚫고 내게 왔다(Er ist gekommen in Sturm und Regen)'


"그는 비와 폭풍우를 뚫고 내게로 왔네. 이제 다가오는 것은 봄의 축복. 나의 사랑은 멀리 여행을 떠나고 

나는 맑게 갠 날씨를 바라보네.  그리고 그는 내가 가는 모든 길목에 존재하고 있다."


*제2곡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한다면...'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면, 태양을 사랑하세요. 젊음을 사랑한다면 해마다 젊어지는 봄을 사랑하세요. 

 보석을 사랑한다면, 많은 진주를 가진 인어를 사랑하세요. 

 하지만 그대가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래요, 날 사랑해줘요. 나도 그대를 영원히 사랑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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