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리오즈의 극적 환상곡 <로미오와 줄리엣>
1782년 프랑스 파리에 오데옹 극장이 문을 열었습니다. 두 차례 화재와 재건을 겪으면서도 유럽 최고의 대규모 극장으로 명성을 굳혀갔던 이곳은 전 유럽의 다양한 작품을 올리는 것을 모토로 했는데, 1827년, 토마스 소바쥬(Thomas Sauvage)가 이끌던 당시에는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을 영국 극단과 함께 원어 공연으로 처음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여러 희곡을 집중적으로 무대에 올리던 시즌, 작곡가 베를리오즈도 객석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빠져들었죠.
도서관보다 오페라 극장을 자주 찾던 이 의과대 학생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뒤늦게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로마 대상에 여러 번 탈락하면서도 꾸준히 도전하며 음악을 비롯한 예술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는데요, 1827년 9월, 베를리오즈는 여기서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을 처음 접했습니다. 영어 대사로 연기하는 공연이었지만 셰익스피어의 극 세계에 완전히 매료됐죠. 뿐만 아니라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여배우 해리엇 스미드슨에게 한 눈에 반했습니다. 그녀는 이 젊은 작곡가에게 오필리아였고, 데스데모나였고, 줄리엣이었죠. 베를리오즈는 이 운명의 여배우와의 사랑을 꿈꾸며, 또 다짐했습니다.
그녀와 결혼하리라,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극을 교향곡으로 만들리라
이 두 가지 다짐을 이루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죠. 1830년, 베를리오즈는 자신의 실패한 짝사랑 이야기(이 역시 스미드슨을 향한 것임)를 소재로 <환상 교향곡>을 작곡해서 작곡가로서 이름을 알렸고요, 마침내 로마 대상을 받았으며, 그 덕분에 1833년에는 스미드슨과 결혼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해롤드>를 높이 평가한 파가니니로부터 거액의 후원금을 받아 형편에도 여유가 생기자, 두 번째 과제에 착수했죠. 셰익스피어를 교향곡으로 만드는 일 말입니다.
1839년 완성된 <로미오와 줄리엣>, 이 곡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장이 아닌 부분으로 나뉘는 교향곡 편성에, 부분마다 극의 장면이 적혀있어요. 세 명의 독창자와 합창단이 등장해서 에밀 데샹이 쓴 가사를 노래합니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맡아 연기하지는 않고, 그저 연인의 사랑에 관해, 분위기에 대해 해설하듯 들려주죠.
1부 메조 소프라노가 부르는 스트로푸스 Premiers Transports Que Nul N'Oublie (잊을 수 없는 처음의 황홀함)
그러니, 완전히 기악곡도 아니면서 오페라도 아닌 건데요, 작곡가는 “이건 그저, 합창이 딸린 교향곡입니다.”라고 소개하며 이 곡의 장르를 ‘극적인 교향곡’이라고 말했습니다.
‘극적인 교향곡’, '극'의 중요성과 함께 ‘교향곡’에 방점을 찍었던 베를리오즈는 극의 장면과 이미지를 음악으로 형상화하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줍니다. 두 가문의 대립은 복잡하게 얽힌 푸가로, 무도회는 화려한 음악으로, 연인이 사랑을 나누는 밤의 발코니는 느리고 보드라운 음악으로 그려지죠.
3부 사랑의 장면 – 적막한 밤
나는 반드시 줄리엣과 결혼해서 저 연극에 관한 교향곡을 쓰겠다.
서른여섯 살, 베를리오즈는 마침내 두 가지 다짐을 모두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전곡 감상
베를리오즈와 스미드슨, 이들의 결혼 생활은 10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인기를 잃은 여배우의 여전히 화려한 씀씀이도 문제였구요, 더 큰 문제는 새로운 사랑에 빠진 베를리오즈였다고 하죠. 한참 연하의 신인 여가수가 베를리오즈의 이름을 업고 유명세를 타고자 했던 건데요,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던 이 작곡가는, 늘 그러했듯, 새로운 사랑에도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고 맙니다. 그렇게 지나간 사랑과 마침표를 찍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