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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Nov 15. 2018

베를리오즈, 셰익스피어, 그리고 줄리엣

베를리오즈의 극적 환상곡 <로미오와 줄리엣>

1782년 프랑스 파리에 오데옹 극장이 문을 열었습니다. 두 차례 화재와 재건을 겪으면서도 유럽 최고의 대규모 극장으로 명성을 굳혀갔던 이곳은 전 유럽의 다양한 작품을 올리는 것을 모토로 했는데, 1827년, 토마스 소바쥬(Thomas Sauvage)가 이끌던 당시에는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을 영국 극단과 함께 원어 공연으로 처음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1820년 오데옹 극장(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1799년, 1818년 두 차례 화재 이후 제2국립극장 오데옹 극장으로 재개관, 초기에는 오페라, 이후엔 고전극을 주로 상연


셰익스피어의 여러 희곡을 집중적으로 무대에 올리던 시즌, 작곡가 베를리오즈도 객석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빠져들었죠.


예술가의 기운을 내뿜는 베를리오즈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스)


도서관보다 오페라 극장을 자주 찾던 이 의과대 학생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뒤늦게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로마 대상에 여러 번 탈락하면서도 꾸준히 도전하며 음악을 비롯한 예술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는데요, 1827년 9월, 베를리오즈는 여기서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을 처음 접했습니다. 영어 대사로 연기하는 공연이었지만 셰익스피어의 극 세계에 완전히 매료됐죠. 뿐만 아니라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여배우 해리엇 스미드슨에게 한 눈에 반했습니다. 그녀는 이 젊은 작곡가에게 오필리아였고, 데스데모나였고, 줄리엣이었죠. 베를리오즈는 이 운명의 여배우와의 사랑을 꿈꾸며, 또 다짐했습니다.


그녀와 결혼하리라,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극을 교향곡으로 만들리라


프랭크 딕시(Sir Frank Dicksee, 1853~1928)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장면을 그린 작품, 1884년 작, 캔버스에 유채(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스)


이 두 가지 다짐을 이루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죠. 1830년, 베를리오즈는 자신의 실패한 짝사랑 이야기(이 역시 스미드슨을 향한 것임)를 소재로 <환상 교향곡>을 작곡해서 작곡가로서 이름을 알렸고요, 마침내 로마 대상을 받았으며, 그 덕분에 1833년에는 스미드슨과 결혼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해롤드>를 높이 평가한 파가니니로부터 거액의 후원금을 받아 형편에도 여유가 생기자, 두 번째 과제에 착수했죠. 셰익스피어를 교향곡으로 만드는 일 말입니다.

 

1850년대에 파리에서 출판된 <로미오와 줄리엣> 악보 표지


1839년 완성된 <로미오와 줄리엣>, 이 곡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장이 아닌 부분으로 나뉘는 교향곡 편성에, 부분마다 극의 장면이 적혀있어요. 세 명의 독창자와 합창단이 등장해서 에밀 데샹이 쓴 가사를 노래합니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맡아 연기하지는 않고, 그저 연인의 사랑에 관해, 분위기에 대해 해설하듯 들려주죠.


본래 4부에서 개정 후 3부로 바뀜. 2부 첫 곡은 홀로 있는 로미오와 카퓰렛 가의 연회 장면, 세번째 곡은 연인을 사랑에 빠지게 한 요정 맵을 묘사한 음악


1부 메조 소프라노가 부르는 스트로푸스 Premiers Transports Que Nul N'Oublie (잊을 수 없는 처음의 황홀함)

영상 10분 40초부터 하프 반주 위에 흐르는 메조소프라노의 노래는 정말, 말을 잊게 만드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니, 완전히 기악곡도 아니면서 오페라도 아닌 건데요, 작곡가는 “이건 그저, 합창이 딸린 교향곡입니다.”라고 소개하며 이 곡의 장르를 ‘극적인 교향곡’이라고 말했습니다.

 

‘극적인 교향곡’, '극'의 중요성과 함께 ‘교향곡’에 방점을 찍었던 베를리오즈는 극의 장면과 이미지를 음악으로 형상화하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줍니다. 두 가문의 대립은 복잡하게 얽힌 푸가로, 무도회는 화려한 음악으로, 연인이 사랑을 나누는 밤의 발코니는 느리고 보드라운 음악으로 그려지죠.


3부 사랑의 장면 – 적막한 밤



나는 반드시 줄리엣과 결혼해서 저 연극에 관한 교향곡을 쓰겠다.


서른여섯 살, 베를리오즈는 마침내 두 가지 다짐을 모두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전곡 감상




베를리오즈와 스미드슨, 이들의 결혼 생활은 10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인기를 잃은 여배우의 여전히 화려한 씀씀이도 문제였구요, 더 큰 문제는 새로운 사랑에 빠진 베를리오즈였다고 하죠. 한참 연하의 신인 여가수가 베를리오즈의 이름을 업고 유명세를 타고자 했던 건데요,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던 이 작곡가는, 늘 그러했듯, 새로운 사랑에도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고 맙니다. 그렇게 지나간 사랑과 마침표를 찍으면서요.


해리엇 스미드슨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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