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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시호 Nov 29. 2018

지극히 개인적인 음악 사용 설명서

셀프 BGM 깔기

여행 좋아하세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여행에서 느끼는 낯선 느낌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낯설다는 건 굳이 가치판단을 하자면 부정적인 느낌에 가까울 텐데(낯선 것에 대한 경계는 진화생물학적으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이 느낌을 좋아하는 이유는 일상에서 컨텍스트와 분리해 내기 어려웠던 여러 행동들에, 새로운 컨텍스트를 부여함으로써 기존의 컨텍스트를 걷어내어 그 행동들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하기 때문일 겁니다.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기에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는 안전한 자극. 기꺼운 재인식. 아 쓰다 보니 여행 가고 싶다.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맛있는 음식과 훌륭하게 페어링 된 와인,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어쩌면 대단히 일상적일 이 모든 것들을 ‘새삼스럽게’ 느껴지도록 해 준 것은 바로, 쁘랭땅 백화점의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노을이 가라앉고 있는 파리 시내와 스카이라인, 그 이국적인 풍광이었습니다. 더는 바랄 게 없던 그 씬을 조금 망친 것은 옆자리에 혼자 방문한 젊은 한국인 남성 여행객이었어요. 아마 소개팅을 했던 여성(다음 단계로의 전개를 이행하지 않기로 이미 상호 합의한)과 전화통화를 하는 것 같았는데 심지어 그 내용도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불편했습니다. 테이블 간격이 좁은 탓에 원치 않게 들을 수밖에 없었고요. 아무튼 그곳에서 들려오는 친숙한 우리말 때문에 이 낯선 배경이 확 희석되어버렸습니다. 행복이 망가진 건 아니었지만, 그리고 그 사람이 잘못 한 건 없었지만, 나의 씬이 망쳐진 건 참 아쉬웠어요. 하지만 분명 나와 일행의 대화도 그의 씬을 망쳤을 겁니다. ‘파리에서 멋진 레스토랑에 외국인들 사이에서 혼자서 유유자적 식사하러 온 시크하고 멋진 나’라는  무드를 망쳤을 테니까요. 서로 유감입니다. 


각설하고, 이렇게 낯선 풍광 덕분에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것들의 재인식, 이 여행의 묘미를 좋아하신다면, 이를 가라로 약식으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차음성이 좋은 밀착 방식의 수신기

있어 보이게 말하고 싶어서 그랬는데, 헤드폰이나 이어폰을 말합니다. 헤드폰이라면 오버이어 타입이 비교적 차음성이 좋습니다. 하지만 여름에는 귀가 덥고, 그래서 땀이 나고, 그 땀이 디바이스의 가죽 부분을 오염시킬 가능성이 있거나, 외출 시 전체적인 아웃핏과 어울리지 않을 리스크가 있거나 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어폰이라면 흔히 커널형이라 부르는 인이어 타입의 차음성이 압도적입니다. 게다가 차음이 잘되면 이어버드 타입의 이어폰보다 훨씬 작음 음량으로도 감상이 가능해서 귀에 무리를 덜 주기도 합니다. 다만 아무리 실리콘이나 메모리폼 재질의 팁이 연성을 띄고 있고 규격이 다양하다고 해도, 노즐 자체의 크기가 있기 때문에 좁은 외이도를 가지고 있다면 착용이 불편할 수 있습니다. 외이도를 몰딩 해서  제작하는 커스텀 이어폰은 이 모든 단점을 보완하기는 하지만 접근성이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고가라는 면이 아쉽습니다. 제 커스텀 이어폰을 가리키며 보청기냐고 묻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아 이래서 연예인들이 쉘 바깥쪽에 장식을 하는구나 깨닫기도 했죠. 

덧붙이자면 저는 음향기기를 잘 모릅니다. 음악을 전공했지만 아마 이런데 관심이 많은 음악 청자들 보다도 잘 모를 거예요. 대부분의 음악 전공자(보수적 의미의)들이 유사할 겁니다. 여하튼 그래서 아주 거칠게 예를 들 수밖에 없었지만 하이엔드 이어폰/헤드폰은 스피커만큼이나 매니악한 분야니까(역시 돈 쓰는 재미의 스펙트럼은 넓어요!) 자세하게 정리된 웹상의 문서들을 통해서 쉽게 조사할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이것을 '덕후의 사회환원'이라고 부릅니다. 


2. 특정한 컨텍스트를 가진 음악의 음원

그것이 지극히 개인적이건 보편적이건 상관없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특정한 분위기를 환기할 수 있는 음악이면 됩니다.


이 두 가지가 준비되었다면, 일상에서, 음악을 듣습니다. 준비물 1은 상당히 중요해요. 일상의 소리에 음악이 더해진 것과 그 소리가 모두 차단되고 음악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느낌이 매우 다릅니다. 그러니까 이후 언급되는 ‘듣는다’는 행위는 이렇게 외부 소리를 차단하고 인위적으로 재생하는 음향만을 전달하는 기기를 이용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미리 밝힙니다. 


그럼 나머지는 음악이 모두 해 줄 겁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상적인 행동이 상당히 새삼스럽게 다가올 겁니다. 조금 유치하게 말하자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질 겁니다. 혹시 잘 와 닿지 않는다고 생각하실 분들을 위해, 제가 즐기는 용례 몇 가지를 제시합니다.



일터로 향할 때는 대체로 분노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이 계시다면 그 훌륭한 업무환경이 부럽습니다. 저는 가끔 살의를 느끼게 하는 클라이언트나 카운터파트를 만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함께 하는 음악으로는 이 음악이 효과적입니다. 미팅 장소로 향할 때 특히 좋아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한정입니다. 자차를 운전할 때는 외부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위험하니까요!)


Niccolo Paganini <Caprice No.24> 
Vn. Alxander Marvov

나는 친절한 금자씨다. 친절해 보이지만 언젠가 다 죽여버릴 거야. 너나 잘하세요. 영화 <친절한 금자씨> OST의 모티브가 된 이 음악의 리듬에 맞춰서 신발 굽을 땅에 꽂을듯한 걸음으로 걸어줍니다. 이 롤플레잉에 몰입되어 분노의 에너지를 조금 발산하고 나면,  미팅 현장에서 조금은 성질을 누그러뜨릴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의 몰이해가 야속하고 서러운 어떤 날은, 그래 너희 머글들이 뭘 아느냐! 나는 사실 재 호그와트의 마법사다! 알 턱이 없지! 내가 속한 이 세계를!이라는 느낌으로.


John Williams <Hedwig's Theme from Harry Potter>
2011 BBC Proms
Cond. Keith Lockhart,  BBC Concert Orchestra





저는 특정 시간에 고양이들 간식을 주는데, 습식 간식이라서 바로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아주 귀찮아지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바로 설거지를 하는 편입니다. 일본에서 기획 및 디자인된, 집사들 사이에서 인기 많은 고양이 전용 식기에, 양치를 싫어하는 고양이들을 위해서 치석 제거 효과가 있는 보조제 한 스푼을 더해 섞고, 보조제 특유의 향을 감추기 위해서 동결 건조된 북어 블록을 손으로 잘 부숴서 토핑해 준 뒤, 다 먹기를 기다렸다가 설거지를 하는 이 루틴이 대체로는 행복하지만 때로는 내가 아닌 다른 생명체를 위해 정성을 기울이는 일이 비루하게 느껴집니다. 고양이들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요. 그럴 때 이런 음악과 함께 합니다. 


Gregorio Chant <Beatam Me(Communion)> from Assumption Mass
Notation from the Liber Usualis (1961), p. 1604. 
Cantarte Regensburg


가톨릭교회의 미사 예절은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로 이루어져 있는데, 성찬전례의 가장 중요한 파트는 성찬의식입니다. 사제는 밀떡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그 성체와 성혈을 스스로 영한 뒤 신자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모든 예식이 끝나면 성체와 성혈이 담겨있던 성배에, 마치 발우공양을 하듯 물을 조금 부어 헹구어 마신 뒤 마른 수건으로 잔을 닦고, 성반도 닦아 예식을 마무리합니다. 링크된 음악은 중세 시대, 가톨릭 교회력의 중요한 절기 가운데 하나인 <성모승천 대축일> 미사에서 이 예식 전에 불렸던 노래입니다. 고양이 간식 그릇을 닦으며 이 노래를 들으면 집사 노릇이 아니라 무언가 성스럽고 경건한 의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딱히 신앙심이 고취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의 비일상화'에는 충분합니다.
 

+ 딕션이 아주 좋진 않지만, 얼굴이 아주 좋은 그레고리오 성가 영상이 있어서 링크합니다.

Gregorio Chant <Victimae Paschali Laudes(Easter Sequence)> 
Voc. 강동원, 김윤석
영화 <검은 사제들> 중에서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사운드트랙 버전도 링크합니다.

두 배우가 만들어내는 헤테로포니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배우 김윤석의 노래는 정말 현실감 있고요.

Gregorio Chant <Victimae Paschali Laudes(Easter Sequence)> 
Voc. 강동원, 김윤석
영화 <검은 사제들> OST 중에서





바쁘고 여유 없는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훌쩍 흘러버린 시간에 깜짝 놀라며 시간의 빠름을 원망하는 날에는 괜히 예스러운 소리를 찾게 됩니다. 


Johann Sebastian Bach <Goldberg Variation>, BWV 988
Pf. Glenn Gould


사실 이건 고음악이나 원전악기 뭐 그런 것 보다, ‘녹음 상태가 후진’ 옛 리코딩인 게 중요합니다. 어차피 낭만주의 시대나 바로크 시대나 우리에겐 너무 옛날이라는 것은 매한가지니까요. '현실적인 옛날'을 느끼기 위해서는 바이닐 음반 재생을 담은 음원, 너무 깔끔하게 리마스터링 되지 않은 옛 녹음, 연주 실황, 이런 것들이 효과적입니다(그래서 1955년 레코딩이 아닌 이 음원을 링크했습니다. 유튜브에서 찾을 수 있는 1955년의 연주는 너무나 깨끗하게 리마스터링 된 것들 뿐이더라고요!). 아무튼 이 음악, 이 연주는 삭막한 도심 빌딩숲에서 들을수록 매력적인데, 차음이 너무 잘되는 이어폰으로 들으면 굴드의 허밍이 너무 리얼하게 느껴져서 흠칫 놀라는 단점도 있습니다. 얌뽐뽐뽐뽐뽐뽐뽐 욤!





대놓고 몰입을 돕거나, 무의식적인 몰입을 유도하거나, 무의식적으로 거리 두게 하거나, 대놓고 거리를 만들어내거나. 이것들은 사실 음악의 부수적 사용의 오랜 전통입니다. 우리는 매체에 수반되는 이런 음악들에 지속적으로 노출이 되어왔기 때문에 이미 학습이 되어 있습니다(개이득!). 바꿔 말하면 이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음악어법이라고 말하는 음악의 언어적(혹은 다른 기표적) 지시 같은 것들을 반드시 구체적으로 알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청중들에게 특정 정서를 유발하거나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의도를 가진 작곡가라면 그것을 알아야겠지만요. 그저 음악과 매칭 되는 컨텍스트를 가질 수 있고, 그 음악을 재생할 때 그 컨텍스트를 환기할 수 있는 능력만 가지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대개 그것들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요.


상대성 이론은 잘 모르니까(문송합니다), 칸트가 제시했듯이 시간과 공간 표상을 인식의 두 축이라고 전제하여 말하자면, 음악은 공간을 완전히 새롭게 인식하도록 해줍니다. 그렇다는 것은 공간 인식에 있어 소리/청각자극이 얼마나 큰 축을 담당하는가에 대한 방증이기도 합니다. 


친숙한 컨텍스트가 얼마나 무섭게요. 특정한 세대는 베토벤의 명곡 엘리제를 위하여를 듣고 후진하는 장면이 아닌 다른 것은 상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생활 속에서 이런 컨텍스트는 대개, '주어집니다'. 그것을 인위적으로 세팅할 수 있다면, 일상의 재인식이라는 안전한 자극을 토핑 삼아, 좀 더 색다른 시간을 살아볼 수 있을 겁니다. 





음악이 영화에 부여하는 컨텍스트를 관객이 자연스럽게 파악하는 것에 대한 글이 여기 있어요 : )
https://brunch.co.kr/@musicology/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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