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하지 말게. 이 또한 지나갈 걸세."
답장이 늦었네. 인사부장 발령받은 지 고작 일주일 됐다보니 배워야할 게 한 둘이 아냐. 주변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연락이 많이 오기도 하고. 자네 아들이 이번에 우리 회사 지원했다지? 대학로에서 막걸리 먹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이 지났네 그려. 격세지감이야. 그나저나 아쉬운 말을 전해야할 것 같네. 이번 상반기엔 힘써주기가 힘들 것 같아. 알지 않은가. 보는 눈도 많고, 전임 인사부장이 청탁받고 좌천된 터라 지금은 몸을 사려야할 시기일 듯하네.
사내에도 이런 저런 공고가 내려오고 있어. 이번 채용 담당하는 직원들한텐 지침이 내려오기도 하고. 그런데 참 재밌지 않은가. 지침 결재라인에 올라간 본부장도, 사장도···. 내가 들은 것만 두 손에 꼽아야할 정도인데 말이야. 그래도 내 자네 절절한 사연을 모른 체하진 않겠네. 우리가 보통 우정이었는가.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언론에서도 말하지만 우리 같은 민간 기업은 조사나 처벌에 한계가 있거든. 지금 줄줄이 터지는 은행들이야 금감원 같은 정부 기관 감독을 받는 입장이지만 말일세. 아마 하반기쯤에는 좋은 소식 들을 수 있을 걸세. 정부에서도 처벌할 근거 마련하겠다지만 그 법안을 누가 만드는가. 결국 제 살 깎아 먹기밖에 안 되는데, 동의 안 할 걸세.
사실 이 채용비리라는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아. 뭐 물론 내 아들, 딸이 피해를 보는 쪽이라면 피가 거꾸로 솟구치겠지만. 우리는 내 아들, 딸 피해보지 않게 할 정도는 되니 다행이지 않은가. 기업 입장에서는 이 주고 받기 채용이 꽤나 합리적이네. 사실 뽑아 놓고 보면 거기서 거기거든. 이제 갓 사회에 나온 애들에게 뭐 대단한 걸 기대하겠나. 그저 서글서글하고 조직에 피해만 끼치지 않을 정도만 되면 다행이지. 또 요즘엔 부모의 재력이 자식 수준을 결정하는 시대 아닌가. 청탁으로 들어오려는 지원자들 보면 스펙들이 뛰어나. 학교면 학교, 영어면 영어, 인턴이면 인턴까지. 속된 말로 꿇리지가 않아. 자네 아들도 A대 나왔다고 했지 아마? 아들 참 잘 키웠구려.
더구나 경제적이기까지 하지. 기업은 꿩도 먹고 알도 먹는 거야. 이 청탁 채용이란 게 일종의 고려시대 ‘통혼 정책’과 비슷하네. 고려 왕건이 지방 호족 자녀들과 사돈 맺었던 것 말이야. 우리 회사가 청탁을 받는 이유도 통혼책의 목적과 비슷하네. 경우는 크게 두 가지네. 첫째는 당장에 도움이 되거나. 둘째는 나중에 도움 되거나. 어떤 경우든 관계없네. 두 번째의 경우라도 기업은 이익이지. 자식이 볼모로 있는데 대차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나중에 뭘 요구하더라도 기업에는 면이 생기는 거지. 물론, 당장에 이익을 가져다준다면 금상첨화겠지? 때문에 이 채용 청탁이 들어왔을 때 기업은 계산을 해. 거절하는 경우도 있지. 하지만 그 경우에도 기준이 도덕은 아니야. 철저히 활용가치 우선으로 해 고민하지. 부탁하는 사람들도 처음엔 넌지시 이야길 던지다가, 한 번 거부당하면 얼굴을 싹 바꿔 엄포를 놓는다네. 자식도 자식이지만, 본인이 무시를 당한다 생각하는 게지. 그래도 어쩌겠는가. 약육강식이 이 청탁 채용 시장의 본질인 것을.
참, 자네 질문에 답함세. 괜히 시기 잘못타서 아들이 불이익 받는 건 아닌지 물었지 않은가. 하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하네. 청탁을 하는 게 자네만은 아니야. 이제 일주일 됐는데도 이래저래 받은 연락만 10건이 넘네. 하루에 한 건보다 더 많은 셈이지. 사실 지금 발등에 불 떨어진 강원랜드만 해도 외부에 알려진 것만 200건이 넘고, 피해자는 800명에 달하지 않은가. 이 문제에서 깨끗한 곳은 없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의심이지. 아니, 팩트라고 봐도 무방할 걸세. 너무 마음 졸이지 말고 천천히 기다리게. 내 자네 아들만은 꼭 힘 써주겠네. 그럼 또 연락함세.
추신
일단 즉시 채용은 아니고 대기명단에는 올렸네. 앞에 차들이 많아. 회장 추천이 둘, 본부장 추천이 셋 있거든. 아마 동기, 동창이랑 사외이사 쪽에서 부탁이 왔나봐. 미안하네, 내 능력이 또 거기까진 안 되네. 혹시 시간되면 자네 집 근처 B 교회라도 나가보는 게 어떤가. 우리 본부장이 거기 장로로 있거든.